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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수상한 메신저 / 여름날의 첫사랑이여 01

by 씨커Seeker 201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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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첫사랑이여

01

 

written by. Seon

 

Zen & You

 

 

"류 현, 너 뭐하고 지냈어?"

 

류 현. 이름이 류 현이였다. 내 어릴 적을 함께 하던 죽마고우, 소꿉친구.

그동안 얼굴도 한 번 못 본 채로 무려 10여년 만에 하게 된 재회치고는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누가 보면 자주 만난줄 알겠네. 오묘한 아이러니에 비식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그런 나를 왜 웃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류 현은 이내 내가 물었던 말에 대답을 꺼내놓았다.

 

"뭐… 그냥저냥 지냈지. 별 일은 없었어."

"뭐야, 그게!"
"응? 진짜 별 일 없었는걸?"

 

자긴 결백하다는듯 어깨까지 으쓱. 야, 우리가 못 본 10년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게 말이나 돼?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그런 성의없는 대답이라니.

내가 열심히 노려보자 '내가 아무리 잘 생겼어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곤란한데...' 라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더니

내가 살고있는 집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 본 사이에 이렇게 뻔뻔해졌을 줄이야.

 

어렸을 때의 류 현은 그 또래 답지 않은 자상함과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애였다.

그래서 낯을 가리고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던 나에게 유일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내가 넘어져서 징징대고 있으면,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나서 두 손 붙잡고 벌떡 일으켜주고,

어쩌다 동네 아이들에게 의미없는 놀림이라도 받을라치면 또 불쑥- 나타나서 나를 제 등 뒤에 숨겨주기도 하고.

 

그 외에도 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은 꼭 사서 손에 쥐어주거나 내가 어딘가를 가게 되면

무조건 따라와서 마치 내 보호자인 마냥 주위의 위험요소들은 없는지 살펴보기 바빴다.

덕분에 우리 둘이 길을 돌아다니면 또래 꼬맹이들은 우릴 보고 얼레리꼴레리 한다고 소리치고 도망치기 바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우리의 의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나와 류현의 엄마에게 우리를결혼 시켜야한다며 호호호 웃는게 일상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나랑 키 차이도 별로 안 났던 꼬맹이 주제에 정의의 기사놀이, 혹은 왕자놀이를 하고 앉았다는 생각에

코웃음이 먼저 나지만, 뭐가 어쨌던 그 당시의 나는 류 현 덕에 아무 걱정없이 신나게 놀 수 있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건 영원히 비밀이지만, 난 이러한 이유로 한동안 류 현이 나보다 오빠인줄 알았다.

매일같이 내 옆에 붙어서 날 챙겨주던 류 현이 그 때는 정말 커보였으니까.

그 착각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초등학교에 첫 등교를 했던 날,

류 현이 내 옆자리에 앉아서는 '1학년 1반'이라는 종이명찰을 달고 있던 모습을 보고 깨졌지만.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너무 나만 쳐다본다?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잠시 옛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류 현의 한 마디.

우리 집을 꼼꼼히 탐색하듯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어느 새 날 향해져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한 채로.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알아알아. 다 내 얼굴이 잘못이지. 신은 왜 날 이렇게 잘 생긴게 태어나게 하신걸까?

너가 빤히 쳐다보는 것도 이해 돼."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덤으로 꺼낸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삐져나왔다.

10년이 긴 세월이긴 한가보다. 어릴 적 내가 류 현에게 느꼈던 어른스러움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대신 왠 능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 앉아버렸다니.

 

괴상하게 찡그려진 내 얼굴을 쳐다보던 류 현은 '너가 아무리 이상하게 봐도 내가 잘 생겼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라고 말하곤

이내 다시 눈을 돌려 우리 집을 샅샅이 훑어본다. 마치 평생을 그리워 한 연인을 보듯이

우리 집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류 현을 바라보고 있자 머릿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퐁퐁 솟아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류 현과 만나지 않게 된 이후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지금의 대학교까지 친구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 애들과는 거리감을 느꼈었다. 두 어번 정도 사귀어봤던 남자친구들도 마찬가지.

무언가 빠진 것 같은데, 그 '무언가'가 없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분이랄까?

애초에 내가 강의만 끝나면 칼같이 집에 달려와서 돌담에나 자빠져있던 것도 다 이 거리감 때문이다.

 

처음엔 내 성격에 정말 지대한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현재 대면하고 있는 류 현과의 옛 기억까지 생생히 떠오르는 지금,

이건 모두 류 현 탓임이 틀림없다. 날 아주 응석받이에 어리광쟁이로 만들어놨으니 내가 이 모양이지.

분명 그 애들에게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은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챙겨주는 다정함.

애정결핍도 아니고 뭔가 싶겠지만, 그 어릴적부터 류 현이 주는 애정어린 우정에 빠져 살았으니 지금 애들이 마음에 찰 리가 있나.

조기교육이 잘못되었단 말이지.

 

아무튼간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지금 이건 무슨 태도냐고. 내가 앞에 있는데 우리 집이나 보고 있고.

괜히 서운하고 꽁깃꽁깃한 마음에 여전히 돌담에 앉은채로 내 앞에 서있는 류 현 무릎께를 발로 찼다.

마음 같아선 그냥 불꽃킥을 날리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 무릎뼈를 나가게 할 수는 없잖아.

에라이, 흙이나 잔뜩 묻어라. 하얀 편인 류 현의 피부에 내 신발자국이나 낼 겸 두어번 툭툭 차니까

우리 집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내린 류 현은 태연하게 웃으며 한 마디 한다.

 

"뭐가 그렇게 심통 난거야, 응?"

"…아무것도 아냐!"

 

아… 안타깝게도 10년 만에 본 류 현의 웃음은 미남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나에겐 치명타였다.

뭐, 솔직히 아까 류 현이 한 말은 크게 틀리지 않긴 했다. 딱 봤을 때 객관적으로 잘 생긴 외모긴 했으니까.

결국 나는 류 현의 무릎을 차느라 도당도당거리던 발을 살포시 멈췄다.

 

하긴, 류 현은 어릴 때에도 꽤나 괜찮은 얼굴이어서 웃는 게 이쁘다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이쁨 좀 많이 받았었지.

그 때는 조금 질투나고 그랬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십분 이해가 간다.

아무리 봐도 내가 웃는 것 보다는 류 현이 웃는게 훨씬 이쁘다.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보다 웃는게 안 이쁜건 조금 마음 아프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

 

내 얼굴과 류 현의 얼굴을 비교하고 있자니 갑자기 집에서 살림하느라 정신 없는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류 현을 이뻐하는 동네 아줌마들 중에서도 대표격.

얼마나 이뻐했는지를 말하자면… 속된 말로 류 현을 물고, 빨고, 핥고 했달까.

물론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좋아했다는 뜻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내미나 좀 그렇게 이뻐해주지.

 

날 팽개치고 류 현을 끌어안은채로 어화둥둥 하던 엄마 생각에 조금 부루퉁해져서

류 현과 엄마를 대면시키는게 별로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엄청 좋아했던만큼 특별히 말은 꺼내봤다.

 

"지금 집에 우리 엄마 있는데... 들어갔다 갈래? 우리 엄마가 너 완전 이뻐했잖아."

 

맨날 너보면 볼 꼬집어주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분명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할걸.

한 마디 덧붙히고 류 현을 올려다봤는데, 아. 나를 보고 있다. 순간 깜짝 놀라서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감았다 떴다.

 

"뭐, 뭐야, 너..."

 

내가 당황한걸 알았는지 진짜 웃기다는듯 한층 밝아진 미소를 띈 류 현이 꽤나 남자다워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적 느꼈던 어른스러움과 자상함이 아예 없어지진 않은 것 같아서 기쁘지만... 내심 민망하다.

오글거리게 뭐 하는 거냐고 외치며 손을 탁 쳐내니까 금새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얼굴은 계속 빙긋빙긋.

뭐야. 미안한거 맞아? 뭔가 나 혼자 부끄러운 것 같은 상황에 속으로 툴툴대는데 류 현이 말했다.

 

"나도 너네 어머니 보고 싶은데… 오늘은 안 되겠다. 금방 가봐야하거든."

 

다음에 들릴게, 라고 덧붙이는 류 현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또, 웃고 있지 않기도 했다.

아까 맨 처음 봤을 때의 이상한 표정. 방금 전에 밝은 웃음은 어디간거야. 무슨 의미인데?

살살 차오르는 불안감에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입을 벌렸지만 왠지 묻기가 너무 두려웠다.

나에게 묻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듯한 얼굴. 덕분에 굳은 표정으로 류 현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야, 표정이 왜 그래? 응? 너네 어머니 안 뵙고 가는게 그렇게 속상해?

 

돌담에 앉은 나와 키를 맞추기 위해 슬쩍 무릎을 굽힌 류 현이 내 눈을 바라보며 달래듯이 물어온다.

생각보다 강한 여름 바람에 이러저리 나부끼는 내 머리칼까지 귀 뒤로 정리해주면서.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손길에 아까의 불안함은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그 자리를 부끄러움이 대신 차지했다.

 

얼굴에 열이 화악 몰려오는 느낌이 들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격렬하게 파닥파닥 흔들었더니

순간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던 류 현이 이미 바알갛게 익은 내 얼굴을 보았는지 계속 피식피식 웃으며,

 

"너 부끄러워서 그런거지? 아직도 애기네, 이거. 어쩌냐?"

 

라고 말하곤 더 놀리듯이 내 뺨을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애기라는 오글거리는 단어 선택에 아까보다 열 배는 부끄러워져서 다시 확 쳐내려고 했지만

조심스레 뺨을 만지는 그 느낌이 생각보다 좋아서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그냥 가만히 류 현의 손길을 받아냈다.

그나저나 아무리 친했어도 10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역시 소꿉친구는 소꿉친구인가보다.

태평한 생각을 하며 앉아있다가 문득 다른 궁금증이 생겨서 내 볼 을 쓸던 류 현의 손을 잡고서는 얼굴을 쳐다봤다.

류 현, 너 말이야.

 

"너, 내일도 올거야?"

 

이거는 물어보면 대답해줄 수 있는 거잖아. 또 올거야?

아까 놀림당한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류 현이 안 오면 또 다시 무료한 일상

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나 심심해, 와줘, 와줘.' 라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그래. 내일도 오고, 매일 놀러올게."

 

바로 내 기대에 부응해주는 말을 한다. 오늘 만나서 류 현이 했던 말들 중에 -몇 마디 없긴 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말이었다.

옛날처럼 이곳저곳 놀러다니자고 덧붙인 류 현은 내가 붙잡고 있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오늘은 그만 가봐야겠다고 나에게 인사하며 아주 빠르게 내 머리를 한 번 헝클이고는 날 지나쳐서 걸어갔다.

아니, 내가 반응할 시간도 안 주고 혼자 휙 가버리다니!

잠시 머뭇거리는 틈에 이미 저만치 걸어가버린 류 현의 등을 바라보다가 슬쩍 뺨에 손을 올려봤다.

소중하게 쓰다듬던 손의 온기가 남아있는듯 해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 그래도 이쁜 말 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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