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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첫사랑이여

02

 

written by. Seon

 

Zen & You

 

 

솔직히 내일도 놀러온다는 그 말에 기쁘긴 했지만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다.

원래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기에 부득이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아무리 어린 시절 부터 알고 지냈다지만

근 10년간 못 본 소꿉친구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건 아니니까.

그렇기에 반쯤 기 대를 버린 채로 집 앞 돌담에 걸터앉아있는 내 앞에 류 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조금 놀라버렸다.

 

"뭐야, 내가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나도 모르게 진짜 왔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류 현이 한 마디 하더니 날 따라 돌담에 걸터 앉았다.

 

"설마 날 약속도 제대로 안 지키는 그런 시시한 남자로 본 건 아니겠지?"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차마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 하고 말 끝을 흐리며 얼버무렸다.

시시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꼭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건 사실이니까.

 

"뭐야, 왜 대답을 제대로 못 해?"
"..."
"와~ 진짜 내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한거야? 너무한다, 너."
"...미안해."

 

농담처럼 던진 듯한 말에 대답을 못 하자 눈을 크게 뜬 류 현이 내 어깨까지 붙잡고 흔들며 대답을 요구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슬쩍 눈을 피하는 것 뿐. 그런 내 행동이 꽤나 충격이었던지 류 현이 큰 소리로 나에게 너무하다고 외쳤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충분히 서운할 법한 상황이라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치자 더더욱 늘어나는 죄책감.

죄인인 나는 그저 옆에 앉은 류현의 옷깃을 슬쩍 잡은 채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선처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예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고양이 마냥 간절하게 쳐다보면서 시리 팔뚝도 콕콕 찌르며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자

그런 나를 입 꾹 다문 채로 쳐다보던 류 현이 이내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안한거 맞지?"
"응응, 그럼!"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미안하다는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언가 깊게 생각하던 류 현이 내 눈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내뱉었다.

 

"그럼 나, 아이스크림 사줘."

 

 

*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으려고 삐진 척을 한 건 아니었을까?

내 잘못에 대한 대가로 아이스크림은 엄청 싸다고 생각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니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

바로 얼굴이 풀려서는 내 손목 부근을 잡고 씩씩하게 걷는 류 현을 보고 있자니 저런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혹시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 지갑을 거덜내려고 하는건가?

문득 얼마 전에 시내에 새로 생긴 브랜드 아이스크림 가게가 떠올랐다.

친구랑 같이 호기심에 가봤다가 가격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서 아이스크림 한 번 먹고 근 일주일을 빈곤하게 살았었는데...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머리를 푸스스 흔들고는 그냥 류현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그래, 그까짓거. 이번엔 한 이주일 정도만 힘들게 살면 되겠지.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내가 무색하게도 류 현은 그 휘황찬란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쳐 갔다.

'그러면 롯데리아나 맥도날드 정도 가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 곳도 아니라는 듯 지나치고는 이젠 아예 시내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아이스크림 가게는 안 갔으니 지갑을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걸까?

 

만하면 도착 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고 했으나 목적지도 모르고 아무 말도 없이 걷기에는 날이 참을 수 없이 더웠다.

그냥 가만히 앉은 채로 더운건 그럭저럭 즐겨도, 몸을 움직일 때 더위가 증폭되는 느낌은 참을 수 없이 싫어하는지라

결국 류 현의 옷을 쭉 당겨서는 멈춰세웠다.

 

"류 현, 어디까지 가는거야?"
"응? 아, 미안미안. 너 걷는거 싫어하는걸 깜빡했다. 너무 멀지?"

 

살짝 찌푸려진 얼굴과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가닥가닥 젖은 내 앞머리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금새 미안한 표정으로 변하는 얼굴.

그러더니 앞머리를 살살 정리해주고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듯 이야기 해준다.

 

"... 알았으니까 얼른 가자."

 

날 챙기며 내뱉는 말과 행동이 꽤나 다정하기도 했고, 어쨌든 처음에 류 현을 믿지 못 한 죄도 있으니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자 금새 싱글 웃더니 이번에는 손목이 아닌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아까 손목이 잡혀있을 땐 몰랐는데... 류 현은 손이 찬 편인 것 같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뜨끈한 내 손과 류 현의 차가운 손이 맞닿으니

꽤나 좋은 체온으로 섞이는 것이 느껴져서 아까와는 다르게 슬쩍 미소를 띈 채로 류 현을 따라 갔다.

 

확실히 기분이 나아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주변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싱그러운 빛을 머금고 우직하게 자란 나무들, 칠이 다 벗겨진 간판이 눈에 띄는 낡은 문방구에 흙먼지 가득한 운동장까지.

 

"어? 여기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아냐?"
"기억하고 있었네? 거기 맞아."

 

뭔가 굉장히 낯익은 풍경이라는 생각에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니 역시나 맞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지도 못 한 장소에 와서 얼떨떨한 마음으로 학교만 빤히 쳐다보며 걷다가 갑자기 멈춰선 류 현을 못 보고 등에 코를 박아버렸다.

꾸욱 눌려서 그런지 아프다는 느낌이 들어서 코를 만지며 앞을 쳐다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베이커리.

말이 좋아 베이커리지, 빵보다는 초등학생들의 입맛을 노려서 와플, 슬러쉬, 핫도그 등의 군것질 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거기에 협소하지만 들어와서 먹으라는 듯 테이블에 의자까지 있고.

 

여기가 맞냐고 물어보려했지만 이미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까지 잡아버린 류 현을 보고 쭈뼛대며 따라들어갔다.

짤랑- 하고 들려오는 종소리. 그 뒤로는 꽤나 푸근해보이는 아주머니가 가게로 들어오는 날 향해 인사해주셨다.

그에 나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류 현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너 여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거였어?"

 

'1개 1000원' 이라 적혀있는 A4용지를 붙인 채

가게 한 쪽에 놓여져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바라보면서 물어봤다.

 

"응. 우리 어릴 때 여기 자주 왔잖아. 기억 안 나?"

 

그랬었나? 여유롭게 가게 안을 둘러보는 류 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가게 상태만 봐도 꽤 오래된 느낌이 들긴 한다. 빛 바랜 테이블보에 삐뚤빼뚤한 낙서가 가득한 시멘트벽...

얼핏 하교 할 때마다 이런 느낌의 가게를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류 현과 같이 동전을 모아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 먹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우리 용돈 모아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나눠먹고 그랬던 곳! 맞지?"
"오~ 기억력이 아주 나쁘진 않네?"

 

잊고 있었던 과거를 한 조각 떠올린게 기뻐서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날 보고

류 현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놀랐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딱 봐도 날 놀리는듯한 제스처.

여기서 답을 해봤자 분명 어떻게든 더 장난을 칠 것이 분명하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일단 아이스크림이나 사줘야지.

 

진열된 빵들을 정리하고 계시던 아주머니에게로 가서

2000원을 꺼내어 소프트 아이스크림 2개만 달라고 말씀드렸다.

몇 가지 버튼을 띡 누르고 레버를 당기자 금새 뽑아져 나오는 새하얀 아이스크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돈을 드리고 아이스크림을 받아 자리로 돌아와서 류 현에게 하나를 건냈다.

 

어디서나 사먹을 수 있는 흔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지만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장소에서 먹는건 뭔가 확실히 다르다.
그 덕에 나도 모르게 빙긋빙긋 웃음이 나오려는데 문득 느껴류 현의 시선.

건내준 아이스크림은 먹지도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나 쳐다보지 말고 빨리 먹어. 녹으면 아깝잖아."
"그래그래, 알았어."


뭔가 민망한 느낌에 더듬더듬 류 현에게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라는 말을 건냈지만

마치 애를 보듯이 웃으며 쳐다보는 류 현이다. 다정해진건 좋지만 저런 애취급은 사양인데...

한 마디 하려 했지만 그냥 다 귀찮아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나 할짝였다.

 

"...야."
"응?
"넌 항상 그런 얼굴로 날 기다리는거야?"
"그런 얼굴?"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아이스크림에 집중하고 있는데 문득 류 현이 고개를 들고는 굉장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돌담에 앉아서 류 현을 기다리던 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얼굴이란건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바보같은 얼굴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 아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

 

내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류 현은 고개를 저 한 마디만 하고는 말을 멈춘다.

그냥 해본 말이라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는걸?

의아한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자 류 현이 그런 내 눈을 마주보다가 갑자기 씨익 웃는다.

 

"너 말야. 내가 잘생겨서 계속 보고 싶은건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지긋이 쳐다보면 좀..."

 

...아까 그 진지한 표정은 어디로 치웠는지 금새 자아도취에 흠뻑 빠진 말이나 내뱉는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젓고 아이스크림 콘만 오물거렸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저 나르시즘 가득한 멘트는 적응이 안 되네.

아예 대꾸를 안 하겠다는 듯한 내 모습에 '흐음' 하는 소리를 낸 류 현은

아무래도 내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겠다고 느꼈는지 더는 말하지 않고 나를 따라 마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양이라 몇 분도 채 안 되서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우리는

서로 별 말 없이 자연스레 일어나서 가게를 나섰다.

이젠 어딜 가야하지? 카페를 갈까? 근데 방금 아이스크림 먹었으니

또 디저트 먹기는 그럴텐데... 밥을 먹어야 하나?


"...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미안해."

 

조용히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던 내 옆에서 류 현이 시계를 보고는 슬핏 인상을 찌푸리더니 약간 아쉬운 듯한 말투로 말한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가는거야? 나 역시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고 헤어지기는 아쉽지만

내가 그런 티를 내면 괜히 더 미안해 할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류 현의 어깨를 툭툭 치곤 말했다.

 

"다음에 더 오래 있으면 되지, 뭐."

 

그에 슬쩍 웃어준 류 현은 내 머리를 쓸어넘겨주면서 내일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는 혼자 휘적휘적 걸어갔다.

오늘도 꽤나 바쁜가보네. 멀찍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코 끝이 찡해졌다.

고 있어도 불안한 기분. 류 현이 들으면 또 날 못 믿냐며 투덜거리겠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류 현이 전부 안 보일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래, 내일 또 온댔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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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