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1월의 봄

 

written by. Seon

 

Zen & You

 

 

봄이다.

 

비록 밖은 날카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느 겨울날과 다를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젠은 그렇게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도톰한 오리털 이불을 목 아래까지 푹 덮고 자는 여인은 봄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으니까.

저에게 포근함과 따스함을 선사하며 고운 손길을 내밀던 존재.

 

둘만의 영원을 맹세하며 결혼식을 올린지도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젠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 하는 나날이 달콤해 미칠 것 같았다.

아이처럼 자는 그녀를 안고 다시 잠을 청할 겸 눈을 감고 있자니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

 

 

그녀는 젠이 자주 가던 카페 '리엘' 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몸매.

커피를 만드는 실력이 꽤나 괜찮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렇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없는데다가

낯까지 많이 가리는지 카운터를 맡은 다른 직원이 자신에게 '와~ 또 오셨네요, 젠 씨!', '오늘도 같은거죠?' 라며

친근하게 대화를 걸 때도 그녀는 '어서오세요.'와 '안녕히 가세요.' 와 같은 딱딱한 인사만을 반복했기에

젠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리엘'에 들리며 커피를 마신지 한 달쯤 되던 날,

젠은 주연을 맡기로 했던 뮤지컬에서 갑작스레 캐스팅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신 대신 주연을 꿰찬건 이 쪽 업계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 솔직히 꽤나 비일비재한 일이긴 했다.

잘생긴 얼굴로 눈에 띄어서 근근이 단역이나 조연을 연기했던 뜨내기 뮤지컬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것보다는

연기력 인정 받고 인지도 있는 배우를 써서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했겠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끝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들끓는 감정에

주먹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쥐어버린 젠이다. 슬픔, 속상함, 그리고 분노.
자신이 가진 잘생긴 얼굴도 싫었고, 그 얼굴로 인해 자신의 연기를 온전히 바라보지 않고 저평가 해버리는 업계 사람들도 신물이 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미칠 것 같은 느낌에 젠은 충동적으로 밖에 나와서 '리엘'로 향했다.

젠은 '리엘' 이 가진 특유의 안락한 느낌을 좋아했다. 추가적으로 카페 안에 충만하게 풍기는 갓 볶아낸 커피 원두의 향은

마치 아픔도, 상처도 다 끌어안아줄 것만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기에

그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면 젠은 위로받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딸랑-
"어서오세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늘 똑같은 인사가 젠을 반긴다. 그런데 활기찬 목소리 하나가 줄었다.

오늘은 저 조용한 직원만 근무하나보네.

평소 같으면 하하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을 젠이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굳은 얼굴로 고개만 살짝 숙이자 약간 놀란 듯한 눈의 직원. 표정이 나타나는걸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 젠이었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딱딱한 말투로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하고는 한산한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자리를 잡았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직원이 가져온 커피가 젠의 테이블에 놓였다. 달콤하고 은은한 헤이즐넛.

기분좋게 풍기는 향과는 상반되는 자신의 감정상태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익숙하게 커피 잔을 들려던 젠은

작은 손이 우물쭈물하다 테이블에 슬쩍 올려놓은 붉은색 꽃 한 송이에 시선이 멈췄다.

 

"... 이 꽃은 뭐죠?"
"저... 금어초라는 꽃이에요."
"꽃의 이름을 물은게 아니라 왜 주시는 건지 물은겁니다만..."

 

꽃을 응시하던 시선을 살짝 올려서 직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은 젠이다.

 

"아! 그, 그게... 젠... 씨가 힘들어 보이셔서..."
"그래서 이 꽃을 주는거라고요?"

 

근데 이건 어디서 가져온... 꽃의 출처도 함께 물으려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조그맣게 고인 물에 시선이 간 젠이다. 이건 왠 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스쳐지나간 생각에 카운터에 놓여있는 화병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한 송이가 부족한 기분인데...

찝찝한 느낌에 화병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듯한 표정과 불긋하게 뺨에 피어오르는 열꽃. 저 화병에서 한 송이 빼온 것이 맞나보네.

젠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꽤나 귀여운걸?

젠이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로 직원은 그저 꽃을 화병에서 빼온걸

들켰다는 것만 신경쓰이는지 고개를 푹 숙여 젠의 시선을 피한 채 작은 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원래 금어초의 꽃말은 탐욕, 오만이지만...

붉은색의 금어초는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격려라. 손을 뻗어 꽃잎을 만지작거리던 젠이 나즈막이 중얼거렸다.

 

"꽃말이 너무 다정해서 좋아하는 꽃인데... 젠 씨에게 드릴게요."
"..."
"저...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다 잘 될 거에요. 그러니까 기운내세요."

 

그, 그리고 꽃병에서 빼온 꽃을 드린 건 죄송해요.  

아마 젠이 '리엘' 에 들린 이례로 가장 많은 말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직원은

횡설수설 마지막 사과까지 마친 뒤 목례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카운터 뒤로 자리를 옮겼다.

꽤나 부끄러웠는지 자신이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있는 직원을 젠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슬핏 붉어진듯한 목덜미, 이미 양껏 달아오른 두 뺨.

누군가가 힘들어보인다고 화병의 꽃까지 빼서 건내주며 위로를 건네주는 '여자' 라.

 

처음으로 젠이 그녀를 카페의 직원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서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

 

 

"으으응..."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이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뒤척이자 젠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매끈하게 펴져 있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안 좋은 꿈을 꾸는 건 아닐지 걱정 되어서 좀 더 꼭 끌어안고 도닥여주자 금새 베시시 웃더니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드는 그녀였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에 젠 역시 입가에 미소를 베어물었다.

 

오랜만에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었더니 여운이 남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좀 더 그녀를 끌어안고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려는데 문득 시계에 시선이 닿은 젠이다. 1시 27분.

평소 같으면 진즉 일어나서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까지 먹고도 남았을 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던 젠은 결국 그녀를 깨우기로 마음 먹었다.  

 

"자기야~ 점심 먹어야지~"

 

귓가에 대고 이야기 하자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지 잠에 빠져 있는 채로도 몸을 슬쩍 뒤척이는 그녀였다.

 

"일어나자~ 응?"

쪽쪽-

재차 달콤한 목소리로 깨워보지만 움찔거리면서도 눈을 감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에

젠은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말랑한 귓불, 포동하게 살이 오른 뺨, 가지런히 자란 눈썹은 물론이고

잠에 취해 감긴 눈꺼풀, 매끈한 이마, 살짝 벌려진 채 작은 숨결을 내뱉는 입술까지 전부.

다정하게 쏟아지는 키스세례에 결국 꼬물꼬물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젠을

멍하게 마주보다 두 어번 눈을 비비더니 베싯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젠 씨, 일찍 일어났네요?"

평소 일어나는 시간대를 생각해봤을 때, 아직 아침이 지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긴, 늘 8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였기에 오늘같이 침대에 파묻혀 늦잠을 자는 날은 꽤나 이례적이긴하다.

하지만 내 사랑스러운 공주님.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는걸?

 

"벌써 1시가 넘었어. 우리 자기, 더 늦기 전에 밥 먹어야지?"

"에...? 1시요?"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난거지? 의아하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젠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휘감는 부드러운 감촉.

 

"일찍 일어나는 공주님도 좋지만 나는 잠꾸러기 공주님도 엄청 사랑스러운걸?"

 

젠이 내뱉은 애정 어린 말에 더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던 그녀는

문득 젠이 아직 밥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는 '아, 맞다!'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젠 씨 식사를... 미안해요. 배 많이 고프죠? 

 

푸흐흐. 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갑자기 미안한 표정을 짓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내 식사를 못 챙겨서 그런거였나?

젠은 그녀를 꼭 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안 먹어도 상관 없는데 우리 자기 배고플까봐 그러지."

 

별 것도 아닌 일에 진심을 담아 미안해 하고, 늘 자신부터 생각하는 모습.

연애를 시작한 순간부터 결혼을 한 지금까지도 빠짐없이 봐온 그녀의 행동이건만

젠은 매번 그녀의 배려가 전해져 올 때 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뭉클함, 고마움, 애정 등의 감정이 뭉근히 섞여서 가슴에 스며드는 그런 느낌.

 

"아! 저도 괜찮은데..."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괜찮다는 말을 한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슬쩍 고개만 들고는 젠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조금만 더 같이 누워있으면 안 돼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민망한 대사라고 생각했는지 젠에게서 후다닥 떨어져서

이불을 폭 끌어당겨 덮어 쓴 그녀가 조심스레 눈만 내놓은 채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그녀의 말을 들은 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본인이 얼마나 대담한 이야기를 했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그녀의 몸짓이나 말 한 마디에 휩쓸리고 있는 젠에게는 저 말은 꽤나 유혹적인 대사였다.

물론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젠은 웃음을 멈추고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흐음~ 꽤나 적극적인걸, 우리 자기? 밤에 하는 것만으론 부족한거야?"

"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화들짝 놀라며 손사레까지 쳐가며 부정하는 그녀를 보고 젠은 다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아, 너무 사랑스러워. 큭큭거리며 자신을 다시 끌어안는 젠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젠을 밀어내며 슬쩍 삐진 듯한 어투로 외쳤다.

 

"젠 씨, 절 놀린거죠!"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응?"

 

진~짜 잘못했어, 자기야. 자신을 달래며 사과하는 젠을 보자

언제 투덜거렸냐는듯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그녀였다. 조금 더 삐져있으려고 했는데!

아, 나는 젠 씨한테 너무 약해.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에이,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젠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자신을 마주 안아오는 젠의 손길을 느끼며 싱긋 웃고는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

 

"자기야, 자는거야?"

 

자신의 허릿께를 안고서 품에 파고든 몸을 느릿하게 토닥이자

점점 고르게 변해가는 그녀의 숨소리에 젠이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젠은 그녀가 편안히 자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볼에 입을 맞추고 자신 역시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꿈에서마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부부의 알콩달콩한 일상이 머물던 침실은 금새 조용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어느 따뜻하고 평화로운 1월의 낮이었다.

 

 

 

반응형
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