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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마거리트가 곱게 심어진 화분을 품에 안은 채,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던지고 간

반짝이는 은발을 지닌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 인사치레라고 생각 했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이 슬며시 부풀어 올라 기약 없는 약속을

가슴 한 편에 품고 지낸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꽃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입구에 달린 분홍색 종이 자그맣게 흔들리며 소리를 내면 혹시 그 때의 그 남자가 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

가게 안의 작은 창고에서 꽃을 정리하다가도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왔다가 실망한 것도 수차례.

덕분에 꽃을 사러 오신 다른 손님들만 애꿎게 놀라게 해버려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것도 여러 번 이었다.

 

아아, 역시 그냥 해본 말이었던 걸까.

 

 

Marguerite

02

 

*리효(@Fiancee_A)이세온(@Seon_nia_)이 함께 쓰는 릴레이 소설입니다.

*1화 링크 : http://fiancee01.tistory.com/56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갔다.

하긴, 애초에 꽃을 살 일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잖아.’ 라며 스스로를 다독여보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을 애써 머릿속 에서 지워내려고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이유 모를 애상감만 짙어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본 남자한테 느낄만한 감정이 아니잖아.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 푹 고개를 떨궜다.

꽃향기에 취한 것이 틀림없어. 아니, 이건 봄에 취한 거라고 해야 하나.

 

터덜터덜 늘어지는 발걸음으로 작은 수건 하나를 든 채,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포근한 온도로 내리 쬐는 태양,

청량함이 감도는 하늘, 화사하게 우러나는 꽃향기까지. 성큼 들어선 봄을 느끼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나른하게 부유하는 분홍빛 공기를 한가득 품고는 팔이 찌릿찌릿 저리도록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 뒤,

가게 앞에 진열된 작은 화분들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았다. 상큼하면서도 씁쓸한 향이 매력인 레몬 허브,

봄을 한가득 담은 듯 짙은 붉은 색의 맨드라미, 은은한 향기의 페라고늄, 부드러운 분 냄새를 머금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시클라멘까지.

마치 작은 화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하게 모여 있는 식물들이 햇살 아래에서 각기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고운 수건으로 이파리와 꽃잎에 붙은 먼지들을 살살 떼어내면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있자니 심란한 감정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절로 웃음이 베어 물어 졌다. 아아, 역시 꽃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자신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닥가닥 품고 있는 존재들. 같은 종류의 꽃은 수없이 많다지만, 어여쁘게 가꾸어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보살피고 사랑을 주어야지.

이 가녀린 꽃송이들이 어떤 이의 소중하고 유일한 기쁨이 되는 날까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못 해도 30분은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불편한 자세에 다리가 슬슬 뻐근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꾹 내리 누르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꽃들을 돌보고 있는데, 옆쪽 에서 들려오는 단정한 구두소리. 인적이 잦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냥 길을 지나가는 거라면 굳이 이쪽으로 붙어서 가지 않아도 되는데. 혹시 꽃을 사러 온 손님인건가 싶은 마음에

손에 쥔 작은 수건을 내려놓고,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 하려는데 그런 내 행동보다 조금 더 먼저, 어깨에 올라오는 손.

조심스러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손길에 자연스레 이끌리듯 뒤를 돌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꽤나 예쁜 모양새로 길게 뻗은 다리.

살짝 고개를 올리니 단정하게 묶인 은발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그 때 그 남자다.

 

저 기다렸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같이 놀란 듯 크게 뜨여지는 그의 눈.

사루비아 꽃잎을 섬세하게 새긴 듯한 그 눈동자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날,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그와 시선을 맞췄을 때도 느꼈지만 그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봄날의 달콤함과 열망이 뒤섞인 눈빛.

 

반응 보니까 진짜 기다렸나보네요.”

, 아뇨. 그게... 그냥 너무 놀라서...”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턱을 슬쩍 쓸어내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와서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아, 이게 무슨 추태지. 분명 바보 같아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온 몸이 무겁도록 느껴지는 민망함과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소까지 띄고 빙글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꾸역꾸역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 이 남자만 보면 자꾸 나사가 하나 빠진 것 마냥 맹하게 굴게 되는 것 같아.

 

... 사러 오신 거죠? 들어오세요.”

 

안정을 되찾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가게 안으로 그를 이끌고 들어갔다.

딸랑- 오매불망 기다렸던 손님이 온 것이 반가운 마냥 더 낭랑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그간 그를 기다리며 보였던 행동이

생각나 슬며시 부끄러워졌다그러자 금세 난로를 쬐고 있는 것 마냥 얼굴 가득 퍼지는 따끈따끈한 기운.

정신 차리자, 진짜. 봉숭아꽃물이 든 마냥 붉어졌음이 틀림없는 볼을 손등으로 툭툭 두들기고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떤 꽃으로 드릴까요?”

, 마거리트로 부탁드려요.”

 

, 마거리트다. 분명 처음 왔을 때 사간 꽃도 마거리트였는데.

이런저런 자잘한 생각들을 하며 길게 늘어진 화분들 사이에서 가장 예쁘게 피어난 아이를 들어 올리고 카운터로 돌아오는데

가게 안에 가득 들어차있는 꽃들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봄을 빼다 박은 이미지.

게다가 외모까지 봄꽃마냥 화사하고, 곱고, 거기에 성격까지 달콤하고 로맨틱한 타입 인 것 같았다. 선물로 마거리트라니.

내심 남자의 정성을 한 아름 품에 안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묘령의 여인이 부러워졌다.

그래, 저런 남자한테 짝이 없을 리가 없지.

 

화분에 살짝 묻어있는 흙을 닦아내고, 고운 개나리색의 리본과 포장지를 하나씩 꺼내드는데 나도 모르게 슬쩍 한숨이 내뱉어졌다.

아무래도 봄을 제대로 타는 모양이네. 그것도 그동안 타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몰아서.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남자에게 건네줄 화분에 포장지를 감싸고 리본을 둘러맸다.

바삐 손을 움직이면서 흘끗 남자를 쳐다보자, 어느새 내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시선에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눈을 내렸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건가 싶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따가울 정도로 내리꽂히고 있는 눈길.

덕분에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 이미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 하고, 그저 당황함에 우물쭈물

포장지만 바스락 거리다 분위기를 조금 풀기 위해 대화 주제를 하나 힘겹게 던졌다.

 

여자친구분이 마거리트를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친구요?”

 

의아하다는 듯 나직하게 이야기 하는 목소리.

 

... 보통 남자분이 꽃을 살 때는 여자친구 되시는 분에게 선물하려는 경우가 많아서...”

 

드문드문 이어지는 내 답변에 남자는 굉장히 미적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감해 보이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에 하던 말을 슬쩍 얼버무려 버리고 살살 눈치를 봤지만 남자의 입은 굳게 닫혀서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그냥 가만히 있을걸. 후회가 진득하게 몰아쳤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졌다. 입이 방정이란 것이 이런 경우겠지.

사과의 말을 건넬까 했지만 왠지 더 분위기를 깰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운터 위에 놓인 자그만

탁상시계에서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릴 정도로 계속 되는 정적, 1초가 1년 같은 순간.

불편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조금 더 속도를 내서 포장을 마무리 했다.

새로운 꼬까옷을 입고 어여쁘게 꾸며진 화분을 말없이 내밀자 카운터 앞으로 좀 더 가까이 걸어온 남자는 자켓의 안주머니를

잠시 뒤적이더니 곧 카드를 한 장 꺼내서 건넸다. 조심히 받아들고 결제를 진행하는데, 갑작스럽게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

 

, 여자친구 없습니다.”

?”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새된 목소리로 되물은 나에게,

남자는 조금 더 또박또박하게 입술을 열어 확실하게 읊어주었다.

여자친구, 없다고요.

 

... , ...”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대답도 제대로 못 한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혹시 오해를 받은 것이 기분 나빴던 건가.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 하나. 온갖 생각들이 정리 할 수 없을 만큼

번잡하게 뒤섞이는 와중에, 남자는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멀끔한 얼굴로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꽃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 안녕히 가세요.”

 

그에 급히 생각을 멈추고 버벅거리는 발음으로 인사를 하자, 작게 목례를 한 남자는

포장된 마거리트 화분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남자에게서 작게 들려오는 말소리.

 

내일,”

 

또 올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남자는 가게를 나섰다. 딸랑, 딸랑.

입구에 매달린 작은 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늘어진 테이프 마냥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귓가에 울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듣던, 특별할 것 없는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지금 것은 꽤나 달큰하게 여운이 남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운터에 몸을 쭉 펴고 엎드렸다.

 

정말, 봄이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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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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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편지

 

written by. Seon

 

Jumin

 

 

활짝 열린 창문 밖에서 사근사근한 풀내음이 실린 바람이 날아들었다.

완연한 봄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 포근함을 흩뿌리는 초록빛 향기.

서재를 정리하던 주민은 손을 멈추고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떠난 뒤 처음 맞이하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계절은 무심하게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푸른 나뭇잎들을 잔뜩 단 채로 올곧게 서있는 나무를 응시하던 주민은 시선을 돌려 서재 한 편에 놓인 책상을 쳐다봤다.

깔끔하게 정리 된 고급스러운 원목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손을 많이 탄 듯 표지가 군데군데 헤져있는 책 한 권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향기가 뭉근하게 맴돌던 따스한 봄날, 한 떨기 꽃이 되어버린 그녀를 그리며 쓴 편지가 담겨있는 책.

주민은 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몇 개월 전의 겨울, 그녀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었다.

미루고 또 미루었지만,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주민은 책상 앞에 앉은 뒤, 책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았다.

 

 

낮에 일이 있어서 잠시 외출을 했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한 송이 보았어.

새하얗고 작은 꽃이었는데, 잠시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그대가 생각나서 입을 맞추고 싶더군.

그냥 지나쳐오긴 했지만 일을 하는 내내 머리에 아른거려서 결국 돌아오는 길에

비슷한 모양의 꽃을 한 송이 사서 꽃병에 꽂아두었지. 그대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오늘은 유독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어. 그대가 꽤나 좋아할법한 날씨였지.

차분하게 쏟아지는 따스함을 가만히 느끼고 있자니 언젠가 나에게 소풍을 가자고 조르던 모습이 생각나더군.

그 때도 꼭 이런 날씨였지. 당시에는 일이 바빠서 미루었지만...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와 소풍을 간다고 약속할게, 나의 아가씨.

 

 

책에 쓰여 있는 편지들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글자의 한 획마다 그리움과 애정이 꾹꾹 담겨있었다.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유독 밝은 밤이야. 나의 공주님.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모르겠군.

나는 요 근래 들어서 오늘이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낸 것 같아.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군.

새로 맡게 된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면 괜찮아 지겠지.

그대는 나와 다르게 부디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만 가득했길 빌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지 날이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아.

그대가 더위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그대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선선한 계절이 왔으면 좋겠어.

혹여나 더워서 입맛이 없더라도 식사는 꼭 챙겨먹길 바라.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셰프를 고용해 챙겨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쉽군.

언제나 건강해야해, 나의 아가씨.

 

오늘 그대에게 어울릴법한 옷을 보았어. 새하얀 꽃이 촘촘히 수놓아져있던 노란색 원피스였지.

내가 생각해 온 그대의 분위기와 굉장히 닮았더군. 언젠가 그대에게 선물해주도록 하지.

부디 기뻐해주길 바라.

 

 

서재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주민이 간간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 바스락 울릴 뿐이었다.

사이, 편지에는 여름이 도래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 다가왔어. 올해의 여름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덥다고 뉴스에서 이야기 하더군.

나 역시 더위를 느끼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아.

이런 날에 건강을 해칠 확률이 크니 늘 유의하도록 해,

 

햇살이 꽤나 따가워. 아무래도 자외선 지수가 높은 모양이야.

그대의 여린 피부가 걱정되니 반드시 약을 바르도록 해.

긴팔과 긴바지를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덥긴 하겠지만 그대가 아파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잠이 오지 않고 있어. 더위 때문일까,

아니면 그대의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돌기 때문일까. 그대는 아무 탈 없이 잘 자고 있는 건가?

실은 그대 역시 내 생각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어.

나의 상상이겠지만 기쁘더군. 일단 회사 일도 있으니 잠을 청하려 노력해봐야겠어.

좋은 밤 보내, 나의 공주님. 꿈에서 만나.

 

내일은 바다에 갈 예정이야.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약간의 휴식이 필요 할 것 같더군.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을 거닐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나는군.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겸사겸사 그대의 말이 맞는지도 시험해보도록 하지.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선선해. 아무래도 엊그제 비가 온 것이 기온을 많이 떨어트린 것 같더군.

덕분에 조금은 숨통이 트인 기분이야. 그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더위가 풀렸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예전에 그대가 추천해주었던 책을 한 권 샀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

지금의 내가 읽으면 좋을법한 내용의 책이더군. 하지만 그 책을 보고 있자니

그대가 무척이나 그리워져서 금방 내려놓았어.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 때 마저 보도록 하지.

 

 

그 책은 여태껏 읽지 못 했군. 주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조금 서늘해지는 계절이 돌아왔어. 그대는 따뜻한 곳에서 편히 지내고 있는 건가?

아직 추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조심해야해. , 식사는 잘 챙기고 있는지도 걱정되는군.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해줘, 나의 공주님.

 

밖을 나가보니 나무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더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대가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를 만들던 것이 생각났어.

물론 금방 부스러져서 안타까워하던 얼굴까지도. 무척이나 귀여웠지.

다시 한 번 그 모습이 보고 싶군.

 

근처에서 축제가 열린다는군. 밤에는 불꽃놀이도 한다던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대와 불꽃놀이를 보러 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대라면 분명히 좋아했을 텐데... 다음에는 꼭 함께 가도록 하지.

한국이 아닌 해외의 불꽃놀이도 괜찮을 것 같아.

 

오늘 고급스러운 와인을 한 병 선물 받았어.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라더군.

나조차도 잊고 있던 생일이라... 우스운 이야기지만 난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지 않아.

물론 내 생일도 포함해서. 그렇게 중요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대의 생일만은 늘 머리에 새겨져있어.

, 그러고 보니 곧 그대의 생일이 다가오겠군. 미리 축하의 말을 건네지, 나의 공주님.

 

날이 조금씩 쌀쌀해지고 있는 느낌이야.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 두꺼워졌고, 회사에서도 히터를 틀기 시작했지.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춥지 않아. 지금 정도의 날씨만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군.

 

 

가을의 끝자락을 담은 책은 점차 겨울로 손을 뻗으며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 주민은 조금 굳은 눈빛으로 종이를 넘겼다,

 

 

첫 눈이 내렸어. 옅은 진눈깨비 정도였지만 신기한 기분이 들더군.

일기예보에서도 오늘 내린 눈을 기점으로 완전한 겨울이 온다고 했지. 벌써 겨울이 된 건가...

시간은 매정할 정도로 빨리 흐르는 것 같군. 나는 아직 봄에 머물러 있는데 말이야.

 

오늘은 잔업이 있어서 퇴근이 늦어졌는데, 겨울의 밤공기가 생각보다 더 차더군.

자칫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겠다는 생각을 했어.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그대가 사준 목도리를 착용하고 다녀야겠군. 내 아가씨도 옷은 따뜻하게 챙겨 입길 바라.

 

어젯밤의 꿈에는 아주 오랜만에 그대가 나왔어. 내가 보고 싶은 마음에 들러준 것이라면 꽤 기쁠 것 같군.

하지만 다음부터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는 내가 그대를 보러갈 테니까.

그러니 그저 편안한 곳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어줘.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잠시 창밖 을 내다보았는데, 하늘에서 천천히 동이 트고 있어.

어둠이 밀려나고 밝은 빛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대도 지금 이 시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는 건가?

 

 

  「생일 축하해, 나의 공주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하늘도 그대가 이 땅에 내려온 날을 축하하는지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

그대의 생일에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저녁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 하겠군.

대신 언젠가 함께 할 생일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줄테니 기쁘게 받아주길 바라.

오늘은 유독 더 그대가 보고 싶군. 무쪼록, 그대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길 기도하지.

 

 

펄럭. 아직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마지막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식적으로 피해왔었지만, 새로운 봄이 찾아온 만큼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 하겠지.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메말라 속이 텅 빈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은 뒤에

주민은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보내는, 그의 마지막 마음.

 

 

「아마 이 글이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그대가 떠난 이후부터 작은 책에 편지를 써왔는데, 벌써 마지막 한 장 만을 남겨두고 있더군.」

마음만 먹었다면 일찍 채울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 했어.

조금 두려웠거든. 나답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야.

이것마저 채우고 나면, 그대가 정말 내 곁에 없다는 것이 실감날 것 같았지.」

 

 

글씨를 조금 더 진하게 눌러썼다.

저 멀리, 그녀가 머무는 곳까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닿을 수 있도록.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아.

하지만 벌써 그대가 떠난 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 

이제는 나도, 그대를 보내는게 맞는 것 같군.」

 

 

작은 조약돌이 던져진 잔잔한 물에 은은한 파동이 일어나는 것마냥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주민은 아무렇지 않은듯 마저 편지를 써내려갔다. 

 

 

「무수한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그대와 같이 보낸 나날들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로 남을거야.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더없을 축복을 내려준 신에게도,

그리고 나의 옆에서 늘 함께 해주던 그대에게도.

부디 그 곳에서는 어떠한 아픔도, 고통도 없이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

혹여 내 걱정을 하고 있다면,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고 싶어.

 

 

느릿한 속도로 조금씩 채워지던 작은 책은 어느새

 줄 정도의 여백을 제외하고는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만년필 끝에 진득하게 묻은 잉크를 한 번 닦아낸 주민은 담담하게 한 줄을 채워넣었다.

 

 

내가 이 말을 한 적이 있던 가 모르겠군.

 

 

마지막, 두 줄.

 

마치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듯 미동도 없이 얌전한 빈 공간을 잠시 바라보던 주민은

그 어느때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워나갔다.

속에 품어온 연정을 가득 담아서.

 

 

사랑해.

늘 사랑하고 있어.

 

 

... 만년필을 내려 놓고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남은 미련도 함께 덮어 눌렀다.

 

 

어쩐지 후련하면서도 허탈한 기분에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주민을

검푸르게 깔려오는 저녁의 어둑함이 위로하듯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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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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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화창하니 가족끼리 나들이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일기예보의 말에

신경질 적으로 TV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던졌다. 거실을 나뒹구는 요란한 소리, 짙게 흘러나오는 한숨.

마음에 품은 정인이 한 줌의 재가 되어도,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 늘 새로운 아침과 밤을 맞이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보낸 1년 전의 그 날에 얽매여 있는데.

 

답답한 비소를 지으며 내다본 창문 밖에는 언제나와 같이 하염없이 밝고, 푸르른 하늘이 존재했다.

비라도 오면 좋을 텐데. 맹렬한 기세로 따갑게 내리치는 거센 비를 맞다보면, 당신을 온전히 보낼 수 있을까.

당신이 떠난 것이 다 나 때문이라는, 이 죄책감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절로 지어지는 헛헛한 웃음에 입술을 짓깨물며 일어섰다. 발길이 향한 곳은 거실 한 편에 있는, 먼지가 그득하게 쌓인 책장.

손을 뻗어 진한 나무 색깔을 띠고 있는 앨범을 꺼냈다. 당신과 나, 그리고 태어나지 못 한 작은 생명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는 앨범.

함께 데이트를 가고, 밥을 먹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나날들이 찍혀 있었다.

그 때의 기쁨과 추억을 소중히 매만지며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며 넘기다보니 금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 곳에 외로이 꽂혀있는 작고 까만 사진 한 장. 처음으로 아기가 생겼음을 듣고, 병원에서 받아왔던 초음파 사진이었다.

예상치도 못 했던 소식이었기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조금은 급하면서도, 황홀한 기분으로 결혼식을 준비했었는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고로, 모든 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 교통사고였다. 표면상으로는. 하지만 그 사고는 의도된 살해였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쪽은 자신의 죽음을 노렸다, 세상에 드러내지 못 할 일을 숨어서 처리 하던 정보원이 갑작스레 손을 떼고 모든 걸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으니 조용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테고, 그랬기에 자신이 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이받았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 곳에 있었더라면, 대신 죽었더라면.

사랑하는 당신은 살았을 텐데, 그리고 아기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어 눈에 가득 담았다.

꽃망울도 머금지 못 한 채 사그라진, 당신과 나의 정애의 결실. 누구보다 어여뻤을, 우리의 아기.

 

그리움과 허망함은 진득한 눈물이 되어 손등에 떨어졌다. 너무도 그립고 만나고 싶었다.

그녀도, 아기도. 단 한 순간도 생각 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좀 더 가슴 아리게 보고 싶었다.

내일이 당신의 기일이라 그런 걸까.

 

슬픔에 잠식 되어 척척하게 젖은 앨범을 덮었다. 물기가 어린 눈가를 닦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급격하게 몰아닥치는 어지러움. 중심을 잡아보려 했지만 머리가 망가진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 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는 몸, 천천히 일렁이며 암흑으로 물들어가는 시야.

 

 

아아,

당신이,

보고 싶어.

무척이나.

 

 

-

 

 

깨질 것 같이 지끈거리는 머리로 인해 저절로 정신이 들었다. 천천히 떠본 눈은 뿌옇고, 또 뻑뻑했다. 기절했던 건가.

딱딱한 원목바닥이 가까워져 오면서 부딪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이후로 기억이 없다.

다행이도 몸이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묘한 두통과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래도 머리를 제대로 박은 모양.

기절해 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래저래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음도, 그리고 몸도.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직격으로 맞닿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마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러자 손에 느껴지는 것은 부어올랐을 피부가 아닌,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작은 수건. 젖은 지 오래 안 된 듯 여전히 축축했다.

이건, 뭘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눈을 감은 이후로 변변찮은 지인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그를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당황스러운 감정에 누워 있는 상체를 일으켰는데, 엉덩이 아래 닿는 곳이 푹신했다. 그에게는 조금 작은 듯한 싱글 사이즈의 침대.

그 위에는 분홍물이 옅게 들어있는 솜이불과 노란 꽃이 여기저기 수놓아진 새하얀 베개가 놓여있었다.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한 풀빛의 벽지,

햇살을 한 가닥씩 촘촘히 엮은 느낌의 레이스 커튼, 깔끔하게 정돈 된 책상.

그리고 방 안을 아련하게 맴도는 그리운 레몬그라스의 향.

 

이곳 은 분명히 그의 집이 아니다. 그렇기에 낯설면서도, 한 편으로는 더 없이 낯이 익었다.

내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이제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굳어버린 머리로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어설프게 살짝 닫혀있는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한없이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발소리.

비좁은 틈새로 작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차 크게 번지고,

이내 문이 활짝 열리자 작은 체구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네요?”

 

그녀였다. 이슬을 머금은 듯 고운 목소리, 밤하늘을 한 폭에 옮겨 담은 느낌의 까만 눈동자. 따사로운 눈빛까지.

한 시도 잊을 수 없던 얼굴. 이건 꿈인 걸까. 신이 나를 가엽게 여겨 잠시 당신을 내 꿈에 들여보내 주신 걸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아릿한 통증, 그녀에게서 풍겨져오는 상큼쌉싸름한 레몬그라스향까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머리가 짓누르듯 쑤셔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틀거렸고, 놀라서 다가온 그녀의 손은 그의 어깨를 부축하듯 잡았다.

 

, 갑자기 일어나면 안 돼요!”

 

그 쪽,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 같아요. 그렇게 움직이면 분명 어지러울 거예요. 걱정을 담은 말투였지만 호칭은 생경했다.

그 쪽이라, 이곳 의 당신은 나를 모르는 걸까.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문점.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고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분명, 여기는 그녀의 집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이 여자도, 아마 내가 사랑한 당신이겠지.

혼란스러운 감정에 잠시 멍하니 그녀의 눈만 마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 그 쪽이 저희 집 앞 복도에 쓰러져 있었어요.”

 

처음에는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까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고,

큰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아서 제 방에 눕혀놓은 거예요.”

 

원래 같으면 아무리 다쳤어도 낯선 사람을 집에 들여오는 일은 절대 없을 텐데, 그 쪽, 제 애인이랑 닮았거든요.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예비신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남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녀의 말을, 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애인, 그리고 결혼.

 

, 이거 세영 씨가 들으면 질투하려나?”

 

포근한 웃음을 머금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건, 내 이름. 정말 당신이구나. 당신이 맞구나.

언젠가 깨야 할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신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니.

주체 할 수 없이 울컥거리는 감정을 다독이고, 또 다독이느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그녀에게 들킬까봐 시선을 돌리다 문득, 구석의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년 그녀의 생일날, 같이 놀이공원을 갔을 때 찍었던 사진 중 한 장.

그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에 액자가 있는걸 알았는지 그녀는 걸음을 옮겨 액자를 들고는 그에게 가져왔다.

 

", 마침 사진도 있네요. 여기, 붉게 염색한 머리가 제 애인이에요."

 

사진을 놓고 비교 하니까 확실히 더 닮았네요. 물론 그 쪽은 머리도 더 길고 제 애인보다는 살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가 건네주는 액자를 손에 꼭 쥐고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진으로 본 과거의 최세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당신과 있을 때, 나는 저런 표정을 지었었구나.

까마득한 기억 속을 헤매며 더듬는 것 같았다. 1년 사이에 달라진 건 딱 하나, 당신의 존재뿐인데

행복했던 모습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멍하니 사진만을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머리는 이제 괜찮아요?”

 

머리라. 여전히 지끈거림은 남아있었지만 확실히 아까만큼 심한 건 아니다.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긴요. 많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요.”

 

, 맞다. 그 쪽 자고 있을 동안 식사 준비 하고 있었는데, 괜찮으면 밥 먹고 가요.

베풀어지는 그녀의 선의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미리 불을 올려두었는지 보글보글 입맛을 돋우는 소리를 내며 끓는 냄비.

멀스멀 피어오르는 구수한 메주 냄새는 부엌과 거실을 한가득 채우며 떠돌아다녔다,

된장찌개, 그녀가 아직 살아있을 적, 자주 해주던 요리였다.

 

그리운 향에 취해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쳐다봤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밥통에 갓 지어 올린 따끈한 밥을

고르게 뒤섞느라 분주한 모습, 조용히 턱을 괸 채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 천에 하얀색과 검정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펑퍼짐한 원피스.

 

임신... 한 거예요?”

 

작게 내뱉어진 물음에 그녀가 밥을 뜨다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의문의 빛을 띄고 있는 시선에 그는 조용히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옷, 임부복이잖아요.

 

,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 임부복은 다 세련되게 디자인 되서 배가 안 나오면 임산부인줄 잘 모르던데. 눈썰미 좋으시네요.

누군가가 아기가 있음을 알아봐준 것이 기쁜 지 그녀는 얼굴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피어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를 위해 직접 골라서 선물했던 옷이니까.

 

푸른 도자기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고, 뜨겁게 끓는 찌개그릇도 조심히 옮기고,

식탁으로 자잘한 반찬들을 나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수저를 내려놓고는 식탁 앞에 앉았다.

이제 먹어도 돼요. 묘한 기대가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작게 웃음 짓고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술 퍼서 입에 넣었다. 되지도, 질지도 않고 적당히 쫀쫀하게 잘 익은 쌀밥.

이어 두부와 호박이 듬뿍 들어간 그녀의 된장찌개도 한 숟갈.

 

맛있네요.”

 

입안을 맴도는 진하게 우러난 된장 맛, 그녀의 솜씨 그대로였다.

 

제가 된장찌개 하나는 잘 끓이거든요.”

 

, 입덧이 좀 심한 편인데 제 된장찌개는 맛있어서 그런지 언제 먹어도 술술 넘어 가더라고요.

얼마나 맛있으면 애기도 계속 좋아하겠어요.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말에 그가 푸스스 웃음을 뱉었다.

꿈에서나마 그녀와 재회하고, 처음 내보이는 웃음이었다.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그녀는 좀 더 활짝 웃으며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요새 보는 TV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새로 시작한 취미, 좋아하는 책에 대한 것까지.

 

그녀는 대화 초반에는 사사로운 일상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하다가, 종반에 가서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만을 잔뜩 꺼내었다.

아기가 생긴 지는 4개월이 조금 안 되었고, 배가 늦게 나오는 편이라 사람들이 아직 임산부인줄 잘 모른다는 것, 성별은 예쁜 공주님.

1년 전의 그녀와 이미 나눈 적이 있었던, 익숙한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그는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표현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 아기 이름도 생각해뒀어요.”

 

이름이라니, 그녀와 아기의 이름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눈빛을 보지 못 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름을 짓기에는 조금 빠를 수도 있지만, 태명보다는 일찍부터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었거든요.”

 

세영 씨에게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에 깜짝 놀라게 하면서 알려주고 싶어서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굴 한 번 보지 못 하고 떠나보낸 아기의 이름.

태어나려면 두 손가락에도 다 꼽히지 않을 만큼의 밤을 보내야 하는데, 당신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구나.

눈물이 목에 가득 메여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을 연 순간, 하염없이 흘러나올 것 같았기에.

 

깊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꽉 쥔 채로, 간신히 물음을 던졌다. 이름, 어떤 건데요?

끊어지듯 흘러나온 그의 말에 오물오물 밥을 삼킨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윤이요.”

 

서윤이라고 지을 거예요. 아름다울 서(), 윤택할 윤().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 마음도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서윤, 서윤. 한없이 곱씹게 되는 이름이었다. 당신과 나의 아이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녔구나.

 

이름을 이야기 해주며 아기가 숨 쉬고 있을 배를 천천히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은 가까이 있었지만, 또 한없이 멀었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묵묵히 슬픔을 삼킨 그는 잔잔히, 축복의 말을 건넸다.

 

그 아기, 분명 예쁠 거예요.”

 

아마, 당신을 많이 닮았을 테니까요.

그 말에 놀라움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최고의 칭찬이네요.

기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답에, 그는 그저 작게 미소 짓고는 마저 식사를 재개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당신.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걸까.

행복하고 고마운 한 편, 마음에 앉은 어두운 응어리는 치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이 반대로 그녀가 가져야 할 행복을 좀먹었다는 죄악감. 당신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정말 기뻤을까.

그 생각에 다다르자 우뚝, 젓가락질이 멈춰졌다. 그리고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건데요?”

 

아무거나 물어봐도 괜찮아요. 온화한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며 뜸을 들인 그는, 이내 천천히 질문을 뱉었다.

 

“...당신, 행복해요?

 

애인과 있으면서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한 거 맞아요? 그 질문에, 부산스레 밥상을 치우던 그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조금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겨진 작은 의아함.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져 허탈한 웃음을 한 조각 내뱉었다. 예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앞에 있는 그는 그저 이방인, 혹은 오늘 하루 돌봐주게 된 낯선 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 한 번도 보지 못 한 애인과 행복하냐고 묻는다니. 분명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하며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아니,

비겁하게도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꺼내지 못 했던질문이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다. 나랑 있으면서 정말 행복한 걸까.

혹시 나로 인해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힘들고, 괴로운데, 당신이라는 사람이 너무 착해서,

아무것도 없는 내가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겨져 그저 동정심에 가만히 품어주고 있던 건 아닐까.

 

애매하게 이어지는 침묵. 1초가 영겁의 시간인 것 마냥 느껴졌다. 초조함을 품은 심장은 쿵쿵 뛰며 약하게 아려왔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 행복해요.”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 그는 가만히 그녀의 발치만 쳐다보았다.

대답에 대한 고마움, 안도감,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 박힌 죄책감과 미안함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더 행복 했을 수도 있었는데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 질문은 그가 품고 있던 마음의 짐이었고, 또한 저열한 욕심의 증거였다.

나에게 다가오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계속해서 밀어냈다면,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국 내 손 안에 붙잡아버렸다.

 

만일 누군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세영 씨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고를 거예요. 또박또박한 발음은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가슴 속으로 뻐근하게 차오르는 뭉근한 감정. 그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다른 질문을 꺼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아픈 질문.

 

그 사람으로 인해... 죽는다고 해도요?”

 

죽음. 실제로 나로 인해 맞이한, 당신의 죽음. 가슴에 남은 생채기가 쓰라리고, 슬픔이 몰려왔다.

그는 눈을 꾹 감았다. 그녀가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한 시라도 빨리 알고 싶었다. 최세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진실한 감정, 생각, 모든 것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들려왔다.

 

나는 괜찮아요.”

 

그래도 죽기 전까지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봄 햇살 같은 온기가 가득 담긴 그녀의 목소리.

 

세영 씨는, 저의 전부니까요.”

 

...당신도 나의 전부야.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꺼낼 수 없는 대답을 따갑게 목구멍으로 삼키고는, 감은 눈을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아아, 고맙고, 또 고마운 내 사람.

평생 잊지 못 할, 나의 당신. 울컥거리며 메이는 목으로 그녀에게 말을 전하려는 그 순간, 작은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 어지럼증은 곧 갑작스레 몸을 불리며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안개가 끼듯 점차 흐려지는 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 당신과 다시금 헤어질 시간이구나.

 

꾸역꾸역 삼키고 참았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고마워.

행복하게 있어줘, 그 곳에서.

언젠가 당신이 나를 부르는 날이 오면 꼭 만나러 갈게.

 

그 때는,

다시 함께 있자.

 

 

-

 

 

스르르 눈이 떠졌다. 텅 빈 거실, 차가운 바닥. 멍하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었다. 아무도 없이, 오로지 그만 존재하는, 그의 집. 

미처 내보내지 못 한 눈물 한 줄기가 그의 얼굴선을 따라 주륵 흘러내렸다.

 

그 꿈은, 당신이 준 선물일까.

더 이상 아파하지 말라는 걸까.

 

젖은 눈가를 손으로 닦아내며,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앨범을 주웠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미약한 중얼거림.

우두커니 서서 애정을 읊는 그의 주변으로 익숙한 레몬그라스 향이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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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fection

 

written by. Seon

 

Yoosung

 

 

포동포동 살이 올라있는 작은 뺨, 생기가 가득 찬 눈동자, 향긋한 살냄새. 특유의 때 묻지 않은 해맑음까지.

더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 아이는.

 

 

-

 

 

“아이들이 말썽을 많이 부려서 조금 힘들 수도 있어.”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 봉사 올 생각을 다 하고, 기특하네. 원장은 교복을 입고 찾아온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허물어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고아원에서는 군데군데 초록빛 내음이 새어나왔다. 풀냄새, 나무냄새.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는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느릿한 동작으로 이곳저곳 두리번 거리고 있자니

원장은 고아원 내부를 돌아보자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내부는 외관만큼이나 낡아있었다. 한 발 딛을 때마다 끼익끼익 거리는 나무바닥, 여기저기 쩌적 갈라져있는 콘크리트 벽,

살짝 내려다 본 창틀에는 뿌연 회색먼지가 한웅큼.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원장은 내부 시설을 소개해주는 틈틈이 아이들에 대한 설명도 해주느라 정신 없었다.

이름, 나이,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등.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게 뜯어져 발 끝에 채이는 나무 부스러기를 가지고 놀며 원장의 옆에서 걷던 그녀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의 뒷 편으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작은 남자아이.

 

눈이, 마주쳤다.
뚫어질듯 쳐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민망해서 슬쩍 오른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보았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원장선생님. 저 아이는 누구에요?”

 

저기, 혼자 앉아서 이 쪽을 보고 있는 아이 말이예요. 그녀는 남자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원장은 아이를 보더니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아아, 유성이 말하는거구나.”

 

이름은 김유성, 나이는 아마도 10살.

버려졌을 당시의 나이가 정확하지 않아서 고아원에 들어오게 된 날을 기점으로 나이를 세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성이, 유성이... 천천히 이름을 곱씹고 있는 그녀의 옆에서 원장은 아이를 가리키며 ‘천사’ 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하얀 피부, 태양빛을 흠뻑 머금은듯 화사한 금발, 잘 여문 포도알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 가지런히 꼽고 있는 두 개의 실삔.

뙤약볕 아래에서 뛰놀아 까맣게 탄 아이들과 다르게 혼자 뽀얗고 곱상한 생김새가 언젠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꼬마천사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고 느낀 그녀는 원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천사 같네요.”

 

그녀의 빠른 수긍에 호호 웃던 원장은 유성이를 천사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면서 말을 덧붙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거나 툭하면 엉엉 울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러대며 떼를 쓰는 것이

익숙한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유성이는 늘 인형 같이 고운 자태로 책만 보고 성격 자체가 얌전해서

이 고아원에서 유일하게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라고 한다.

 

얼굴도, 마음도 어여쁜 꼬마천사.
낮게 중얼거린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이의 눈길은 여전히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

 

 

봉사는 일주일에 두 번, 주말마다 진행되었다. 아이들과 친해 질 수는 있을지, 혹시 낯선 사람이라고 싫어하는건 아닐런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첫 봉사날부터 아이들은 그녀를 잘 따랐다. 덕분에 봉사는 무사히 한 달을 넘겨가고 있었고,

이제는 그녀가 고아원 입구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마구 손을 흔들며 반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와, 누나다!"
"우리 유성이, 누나 보고 싶었어?"
"응! 완전 많이!

 

하지만 그런 아이들 중에서도 그녀를 제일 좋아하는 건, 단연코 유성이. 누나라고 부르면서 졸졸 쫓아다니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고,

그녀가 일을 끝내고 쉬고 있을 때는 슬금슬금 다가와서 손을 잡아달라거나 안아달라고 조르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굳이 들어주지 않아야 할 내용의 부탁도 아니었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 매달리는 모습 자체가

안쓰럽기 그지 없어서 그녀는 매번 웃는 얼굴로 유성이의 조름을 받아주었다.

 

껌딱지처럼 그녀에게 달라붙어있는 유성이를 볼 때마다 원장은 놀랍다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지금껏 여러 봉사자들이 다녀갔지만 이렇게까지 따르는 모습은 보지 못 했고,

나이 치고는 조숙한 면이 있기에 무언가 해달라고 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원래 어리광이 많은 타입인줄 알았는데.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반기는 유성이를 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작고 귀여운 남자아이의 풋풋한 애정공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만을 향한 것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역시 지금처럼 계속 유성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건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유성이에게도 그리 좋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자신이 봉사를 하는 한 달 동안, 유성이와 함께 있으면 아쉬운 얼굴로 머뭇거리며 다가오지 못 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이들도 보았고, 직접적으로 왜 유성이만 좋아하냐는 물음을 들은 적도 종종 있었기에

조금 자제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안 그래도 외로운 아이들인데 편애를 체감하게 하는 것은 좋지 못 할 터.

게다가 유성이 역시 자신에게 과하게 매달리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래도 내 선에서 적절히 조절해주는게 낫겠지.

 

"음... 유성아."

"응? 왜요, 누나?"

"앞으로는 누나가 유성이 손도 못 잡아주고, 안아주지도 못 할 것 같아."

 

친구들이 유성이를 질투할 수도 있고, 마음 아파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누나는 계속 유성이 좋아하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해해 줄 수 있지?

허리를 굽히며 눈을 맞춘 상태로 이야기 하자 유성이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안쓰러움에 결좋은 금발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자니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인데, 왜요?"

 

 ...잘못 들은건가? 머리를 쓸어내리던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하자 유성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는 내 건데, 왜 안 되는거에요?"

 

순간, 그녀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작은 어린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단순히 표현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유성이의 표정은 진득한 의문에 가득차 있었고,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 저편으로는 집착과 애착이 뒤섞여 움틀거리는듯 했다. 묵직한 그 눈빛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아이는. 10살 남짓되는 어린애에게서 받을만한 감정이 아니었고,

이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하기에는 그녀 역시 아직 어렸다.

 

 

-

 

 

결국 벌떡 일어난 뒤에 알수 없는 말로 더듬더듬 얼버무리며 도망치듯 자리를 뜬 그녀는

그 날 이후, 의식적으로 유성이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상냥한 애정을 건네며 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은 어린 아이에게서 표현하지 못 할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유성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 날의 대화는 아예 없었던듯, 늘 그랬던것과 같이 그녀에게 다가와 애정을 요구하곤 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전보다 조금 더 심하게. 다른 아이를 챙겨주고 있을 때면 다다다 달려와서 그녀의 손길을 받고 있는 아이를

밀쳐 넘어뜨려 울리는 일도 다반사였고, 안아달라고 조르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땅바닥에 주저앉아 건물이 떠나가도록 우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견뎌왔다. 아직 어린애잖아,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걸거야, 내가 좀 더 잘 하자.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인내심을 뛰어넘는 상황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그녀가 봉사를 시작한 지 두 달 가까이 되던 날, 여느 날과 같이 안아달라고 조르는 유성이의 부탁을 조금 단호하게 거절하자

허망한 표정으로 서있던 아이는 이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는, 일종의 자해 행위를 했다.

난생,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찰싹찰싹,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를 멍하니 귀에 담고 있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다가가 유성이의 손목을 쥐고 말렸다.

그만해, 유성아. 제발, 그만해.

 

애절하기까지 한 그녀의 중얼거림에 아이의 행동은 뚝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꽤나 기뻐보이는 한 마디. 

 

"나 아프니까, 누나가 약 발라줘요."

 

마주친 아의 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밝은 모습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그저 묵묵히 유성이의 손을 잡은 채 고아원 내 의무실로 향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와중에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손을 있는 힘껏 쥐고 있는 유성이.

마음이 무겁고 속이 어지럽게 울컥거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의무실의 낡은 여닫이 문 소리가 유독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두려움, 안쓰러움, 공포, 애잔함. 모든 것이 뒤엉킨 기분.

유성이를 작은 의자에 앉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며 조잡하게 흐트러진 약통에서 연고를 찾아냈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조차도 아이의 시선은 한 시도 떼어지지 않고 자신에게 집요하게 붙어있었다. 전부 느껴졌다.

후우후우. 그녀는 두 어번 심호흡을 하고는 뒤를 돌아서 유성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따가울정도로 붉게 부풀어오른 뺨에 약을 살살 문지르며 최대한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유성아,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우리 유성이 고운 뺨이 아야, 하잖아.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내뱉은 말이 무색하게

아이는 싱글싱글 웃는 어투로 대답했다. 해맑고도, 잔혹하게.

 

"하지만 이래야 누나가 봐주는걸요?"

 

약을 펴바르던 손이, 멈췄다.

밝은 빛을 머금은 순수함, 그 뒷편에 웅크리고 있는 소유욕이

점점 밖으로 기어나오는 모습을 본 그녀는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

아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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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惟一)

 

written by. Seon

 

707

 

 

핸드폰이라는 딱딱한 매체로 나눈 대화가 전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고 친근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가버릴 것만 같은 세상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힘겹게 버티는 나에게

너는 신이 내려준 사자(使者)였고, 빛이었으며, 구원이었다.

 

 

-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처참히 나가떨어진 문, 바스라진 벽지, 산산히 부서져버린 가구들.

너의 온기가 이곳저곳 묻어있던 공간에는 지독한 파열음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덜덜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인 것은 매케하게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힘겹게 들썩이는 무언가, 바스라질 것만 같은 움직임.

불안감이 점철되어 흔들리는 동공에 초점을 맞추고 쳐다봤다.

 

고정된 시야에 보이는 것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너.

조각나고 으깨진 살점들이 이제서야 눈에 보인건 왜일까. 

 

세상이, 멈췄다.

 

 

-

 

 

홀린듯이 걸어갔다. 누군가가 뇌를 꼬아놓은 것 같이 움직임은 한없이 비틀거렸지만 멈추지 않고 걸어 너를 내려다봤다.

그런 나를, 너는 잔잔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미움도, 원망도 들어있지 않은 눈. 그 모습에 눈물이 일렁이고, 시야가 흔들렸다.

날 미워하고 원망해줘. 너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나때문이야.

 

뻣뻣하게 굳어가는 손이 나를 향해 바들거리며 뻗어지고 작은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나약하고 작은 음성.

 

괜찮아요.

 

뿌옇게 변해버린 눈을 찬찬히, 두어번 꿈벅거리더니 물기 하나 없이

허옇게 터버린 입술을 열어 조곤조곤 흘려내는 메마른 읊조림.

 

외로워 하지마요.

 

잔잔히 떠다니는 바람이 덮어버릴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

너는 예정된 마지막에도 홀로 남을 내 걱정을 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서진 잔해가 흐트러진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너를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딱딱한 타일바닥에 망가진 기계처럼 꺾여 누워있는 모습은 초라할 정도로 바싹 마르고 그을렸지만

나에겐 그저 생그러웠다. 갓 피어난 꽃송이처럼, 알알이 여물어 빛나는 작은 과실처럼.

 

여전히 아름답고 빛나는 내 사랑아.

 

괜찮아, 괜찮을거예요. 떨리는 입술로 나조차도 믿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눈을 접고 입꼬리를 올리며 크게 웃었다.

아마 너를 만나 함께 했던 날 중 가장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 내 다리께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손을, 몸을 낮추고 꼭 붙잡아보았다.

따스함, 온기. 어렴풋이 뜨여진 너의 시선은 우리가 맞잡은 손을 향해있었다.

문득 나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조르던 너가 생각나서 마음 한 켠에서 슬픔이 울컥이며 목을 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음껏 너의 손을 잡았을텐데.

나에게 매달려오는 작은 품을 꼭 끌어안고 끊임없는 애정을 속삭였을텐데.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열렬히 사랑해줬을텐데.

 

겉잡을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후회에 꿀꺽 침을 삼켜

간신히 내리누르고는 입을 열어 천천히 이 곳을 떠나고 있는 너에게 말했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대답은 없었다.

남은 것은 이젠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너의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뿐.

 

너는, 나의 고백을 들었을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속으로 던지고 미동 없이 널부러진 너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귓가에 뒤늦은 기억을 읊었다. 고마움과 미안함, 너가 나에게 준 것에 대해, 그리고 내가 너에게 준 것에 대해.

부끄럽게도 너에게 준 것이 많이 없어서 나는 이내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다.

 

허탈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차가운 바닥에 뉘여진 너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의 얼굴에 방울방울 묻어나는 내 눈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삶, 행복, 사랑.

당신은 나에게

유일(惟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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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my summer love

 

written by. Seon

 

Jumin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는 7월의 햇빛을 가득 품은 채, 아지랑이를 꽃피어 올리는 부산의 아스팔트 바닥.

그동안 유래가 없던 지독한 폭염이 될 거라는 뉴스를 전하던 앵커의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평소 추위나 더위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던 주민의 몸 역시 오늘은 꽤 덥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여름용 정장을 챙겼어야했나. 사업거래 차 여러 번 들렸던 부산에서 이정도의 더위를 느낀 적은 없었기에

날씨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게다가 주민은 입었을 때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여름용 정장보다는

묵직하고 중후한 착용감의 기본스타일 정장을 선호하는지라 애초에 여름용 정장 자체를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강 비서에게 몇 가지 사두라고 지시해야겠군.

 

주민은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낸 뒤 오늘따라 유독 더 무겁게 느껴지는 매끄러운 진회색 정장의 단추를 하나 풀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샐러리맨들, 캐쥬얼한 옷차림에 왁자지껄 웃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

그 사이를 묵묵히 지나가며 주민은 준비해야 될 서류들을 생각했다. 당장 내일이 미팅이다.

이렇게 걷고 있는 시간까지 완벽하게 사용해야 성공적으로 거래를 이끌 수 있었기에 주민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러 상황별 시뮬레이션을 떠올리려 했지만, 머릿속은 마치 고장 나버린 비디오테이프처럼 지직 거리다가

이내 새까만 화면만을 내보낼 뿐이었다.

 

꽤나 피곤하군. 따가운 눈을 손으로 덮어 한 번 쓸어내리며 주민이 중얼거렸다.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미팅 생각에 여념이 없었기에 휴식을 취하지 못 했다. 평소 같으면 이정도의 준비는 아무렇지 않게 소화 했을 텐데.

더위가 심한 탓일까. 슬핏 미간을 좁힌 주민은 조금씩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한숨을 내쉬고는

한 시라도 빨리 호텔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상태로는 어떤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에서 눈으로 정신의 초점이 맞춰진 그 때, 주민의 시야에 하얀 원피스가 보였다.

허리 까지 내려오는 갈색 빛의 머리카락, 유난히 마른 몸. 게다가 발에 신겨져 있는 것은 검은색 몸통에

하얀색 선이 세 개 그려진 슬리퍼. 저것을 삼선슬리퍼라고 하던가. 유성이 이것만큼 편한 것이 없다면서

매해 여름만 되면 줄기차게 신고 다니는 그 슬리퍼와 똑같은 모양새였다.

꽤 이질적인 차림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지나갔다.

 

주민 역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특이한 차림새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레 시선이 갈 뿐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하늘하늘한 모양새가 참으로 가냘파 보여 가던 걸음도 멈추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니

위태롭게 한 발짝 한 발짝 걷고 있던 여인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갑자기 바닥으로 천천히 스러졌다.

 

웅성웅성.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쓰러진 그녀를 가리키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

주민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고 상태를 살펴봤다.

다행히 가까이서 본 그녀는 기절하여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날이 너무 덥기에 어지럼증이 온 것이겠지.

아직 정신이 몽롱한지 느릿한 속도로 깜빡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주민은 그녀를 부축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팅 준비는 조금 나중에 해야겠군.

 

인근에 있던 조용한 공원의 벤치에 그녀를 앉힌 주민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C&R 사업이사 한주민. 작게 명함에 적힌 것을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주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민 씨.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주민은 조금 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목적지가 어디지?”

 

가는 곳 까지 함께 있어주지. 또 쓰러진다면 위험하니까. 무심히 건네지는 말에 그녀는 주민을 가만히 응시했다.

리고는 살짝 눈을 피하며 작게 한 병원 이름을 읊었다.

 

 

-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이었다. 그녀는 그 곳에 입원한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고 말했다.

왜 여기까지 나온 거냐고 묻는 주민의 말에 그녀는 침묵을 지키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멀리 걷고 싶었어요. 병원과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그 곳에서 사람들 틈새에 섞여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온화하게 웃었다. 근데 역시 힘드네요, 몸이 약하다 보니까.

 

원래 선천적으로 체력이 안 좋은 건가?”

 

주민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그저 가야 할 시간이 오면

잠을 자듯 조용히 떠나게 된다는 것이 그녀가 덧붙인 설명이었다.

 

"요즘 들어 조금 더 심해지는지 체력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져요. "

 

그래도 엄청 아파하면서 죽는 건 아니라 다행인 것 같아요.

미소를 머금고 덧붙여지는 말에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주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상황을 '다행'이라고 내뱉다니. 자신의 곁에 서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이 작은 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체념하고 살아왔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불쾌했다.

기껏해야 스물이나 갓 넘은 듯 보이는 어린 아가씨가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으며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세상에 조금 더 나은 죽음이란 것은 없어."

 

웃고 있던 여인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자신에게서 빗겨나간 채로 먼 곳을 바라보던

옅은 밤갈색의 눈이 주민을 천천히, 그러나 곧게 응시했다. 어떠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담긴 눈빛.

주민은 그 눈이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아픈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야 하는 건가?"

"..."

"물론 내가 그대의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오늘을 즐겁게 즐겼으면 해."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던 주민은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답지 않은 충고였다.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에게도 필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런 상황은 그로서도 꽤나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난 여인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다니 나답지 않았군.

게다가 이 쪽 역시 낯선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불쾌할 수도 있을 테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주민은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군. 무례한 말일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했어."

 

사과하지. 낮게 내뱉어진 주민의 말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약하게 기쁨이 들어차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말해준 사람은 그 쪽이 처음이에요.“

 

꽤 좋은 기분이네요. 작은 목소리가 나른하게 공기를 울렸다.

아까까지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은 금세 포근한 모양으로 뭉근하게 변했다.

입가에 미소를 배어 물은 그녀는 잠시 따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다시 주민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주민 씨,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조금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부탁일 수 있지만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주민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주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만일 시간이 되신다면 저를 보러 와주 실 수 있을까요?”

 

매일은 아니어도 돼요. 그냥 가끔씩 이어도 충분히 기쁠 것 같아요.

생각지 못 한 부탁에 주민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병문안이라.

잠시 주민의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또래의 친구가 없어서 매번 병문안은 부모님만 오셨거든요."

 

주민 씨는 저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시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는 가장 비슷한 나이고,

오늘 처음 만났지만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꼭 또 뵙고 싶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주민에게 향했던 시선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닥으로 푹 떨구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바래온 적 없는 작은 여인이

처음으로 욕심을 부린 것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전혀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은 흔쾌히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도록 하지.

 

 
-

 

 

그 후로 주민은 매일 같이 그녀의 병실을 찾아갔다. , 음료수, 과일 등 그녀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손에 들고서.

처음에는 왜 그런 걸 들고 오냐고, 몸만 와줘도 고맙다며 겸양을 떨던 그녀도 주민의 행동이 지속되자

언제부턴가는 장난 식으로 더 비싼 거 없냐는 농담을 던지고 꺄르르 웃기도 했다.

점점 그 나이에 맞게 밝아지는 모습을 주민은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지켜봤다.

이전에 처음 봤을 적, 모든 걸 체념한 채 의미 없이 지내오던 때와는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주민이 그녀를 보러 간지 딱 열흘이 되던 때, 그 날은 처리할 일이 많아서 조금 어두워진 시간에 그녀의 병실을 들렸다.

침대에 기대 앉아 창문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민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주민 씨.

 

일이 많아서 전부 처리 하고 오느라 늦었군. 오늘 별다른 일은 없었나?”

 

주민은 자연스레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서 앉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별 일 없었다며 잔잔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어진 주민의 말을 끝으로 시작된 잠시 간의 침묵. 요 근래의 그녀는 주민이 조용해도 늘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를 꺼내며 말을 이어갔는데 오늘의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약간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침체된 느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째깍째깍.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계초침소리만 병실 안을 울리던 그 때 그녀가 평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주민 씨, 그거 알아요?”

 

정적을 깨고 작게 내뱉어지는 물음에 주민은 의문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말이에요. 실은 좀 더 살고 싶어요.”

 

아니, 살고 싶어 졌어요.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말에 주민은 표정을 굳혔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지만, 언뜻언뜻 눈물이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

 

다시 대학 다니면서 예쁜 옷도 사 입고, 친구들과 편하게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이야기도 나누는 평범한 삶.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한텐 그런 시간이 없었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아쉬워 졌다고 해야 하나?”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진지한 주민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그냥 요새 주민 씨랑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여름을 타서 그러나? 애써 밝게 덧붙여진 음성에 주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여름을 타나보군.

장난스러움을 앞에 내세워 자신의 슬픔을 숨기는 그녀를 위해 주민은 그저 모른 척, 묵묵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기에. 주민의 대답 이후 잠시 말을 멈춘 채 조용해진 그녀는

이내 무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 ! 저 말이에요. 저렇게 평범한 일상도 바라고 있지만,

조금 더 특별한 것도 하나 더 바라고 있어요. 뭔지 알아요, 주민 씨?”

 

특별한 것이라. 단순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제를 돌리려던 말치고는 꽤나 궁금증이 생기게 한다.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거지? 주민의 물음에 그녀가 아이같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비밀! 나중에 말해줄게요.”

 

바로 이야기 하면 재미없잖아요. 다시 원래의 그녀처럼 밝게 돌아온 모습에 주민도 조금 편해진 미소를 내비췄다.

나중에는 반드시 알려주도록.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니까.

주민의 말에 그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알려줄게요,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오늘은 이만 가요, 주민 씨.”

 

내일은 도넛 한 봉지 사다줘요. 안에 딸기잼 든 거로만 잔뜩 넣어서요.

자신을 집에 보내면서 당돌하게 원하는 것 까지 함께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주민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마시기 좋은 주스와 함께 사오도록 하지. 좋은 밤 보내길."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뒤돌아 병실 문을 열고 나가는 주민의 모습을 그녀는 하염없이 바라봤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뚜벅거리는 구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민 씨도 좋은 밤 보내요. 빈 병실 안에는 그녀가 내뱉은 소리만 길을 잃고 맴돌았다.

 

 

-

 

 

그 이후로 거의 비슷한 나날이 이어졌다. 주민은 그녀를 위한 선물을 사들고 오고,

그녀는 기뻐하며 선물을 받은 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나날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가 많이 차분해졌다는 것.

자신이 병실에 찾아오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는 점점 밝고 활기찬 모습만 보였던 그녀였기에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반가운 징조가 아니었지만 주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러 온 지, 거의 한달 쯤 되는 날. 저녁노을이 슬쩍 얼굴을 내밀 즈음에

주민은 익숙하게 그녀의 병실에 들어왔고 그런 그녀 역시 주민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주민 씨, 왔어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서로에게 꽤나 물들었다고 주민은 문득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에 잔잔히 미소를 짓고 준비한 선물을 내려놓은 뒤 그녀를 바라보는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불안정하다.

평소랑 비슷한 모습인데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어색함과 이질감.

 

몸이 안 좋은 건가?”

? 에이~ 아니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

 

걱정 어린 마음이 가득 묻어나는 주민의 물음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내가 아파보였어요?”

조금은.

 

그녀의 물음에 주민은 짧게 답했다.

 

아프지는 않은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감성적인 것 같긴 해요.”

 

원래 사람이 꼭 한 번쯤은 그런 날이 오잖아요. 감정이 모락모락 부풀어 오르는 시기라고 해야 할까요?

, 근데 주민 씨는 맨날 무뚝뚝하니까 안 오려나? 감정의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는 자신을 딱 짚어 말하며 그녀가 방싯 웃었다.

 

이제 나에 대해 꽤 잘 아는군.”

 

그에 자신 역시 슬쩍 웃으며 농담으로 되받아쳐주자 생각지 못 한 반응인지 그녀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 처음 저와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 씨, 많이 변했네요.”

덕분이지.”

 

가볍게 대답한 주민은 그녀의 병실 침대 아래에서 보조침대를 잡아 빼고는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늘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던 날과는 다른 행동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로 거기에 앉는 거예요?”

내일은 해야 할 일이 없으니 이곳 에서 자고 갈 거야.”

“...진짜요?”

 

진짜에요? 정말 여기서 자고 가는 거예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거듭 묻는 그녀에게 주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부담스러운 건가?”

아니에요! 그냥... 믿기지가 않아서랄까? 주민 씨는 매일 일이 많으시잖아요.”

 

그녀의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거래처와의 미팅이 끝나고도 주민은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다.

원래라면 진즉 서울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리하게 부산에 남은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주민은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선택한 것.

굳이 그녀가 미안함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주민은 그저 쌓인 일을 어제 모두 마무리했기에 내일 여유가 생겼다고 짧게 말했다.

 

일을 다 끝냈다니... 다행이에요, 주민 씨.”

 

저 역시 기쁜 듯 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주민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맙군.

짧은 대답에도 그저 싱글싱글 웃고 있던 그녀는 잠시간 말을 멈추고 주민을 바라보더니 이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예전에 제가 특별한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한 말, 기억해요?”

 

그녀의 말에 과거를 더듬던 주민은 이내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 주민의 대답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그거, 주민 씨와 계속 함께 하는 걸 바란다는 말이었어요.”

 

원래 더 나중에 이야기 하려 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 전하고 싶어져서 그냥 말해버렸네요.

주민 씨가 있어서 많은 위안을 얻었어요. 고마워요.

아마 주민 씨와 알게 된 것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주민은 그녀를 응시했다. 부끄러운 듯 뺨에 자그맣게 붉은 물이 든 모습이 귀엽고, 어여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났는지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주민은 생각과는 다르게 무심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고백인건가?"

 

그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이내 이불까지 폭 뒤집어쓰며 작게 소리쳤다.

 

", 주민 씨! 고백 아니에요!“

 

이건 정말 고마워서 한 말이고, 고백은 좀 더, 나중에 할 거에요.

이불에 묻힌 채 웅얼거리듯 조그맣게 흘러나온 소리를 들은 주민이 크게 웃었다.

지금껏 주민이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지 못 했던 그녀는 더더욱 이불에 몸을 파묻고 웅크릴 뿐이었다.

주민은 지금 이 순간이 더 없이 즐거웠다. 조용히 다가오는 행복감, 그리고 사랑스러움.

 

한참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달랜 주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와 함께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대화는 나른하고 평온했다. 직접적으로 연인이 되어 함께 하자는 이야기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은 저와 그녀가 이미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 역시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서로 행복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평소보다 일찍 졸린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가 눈을 비볐다.

그에 잠자리에 들라고 말한 주민은 밝게 켜져 있는 병실의 불을 끄고는 베개를 베고 자리에 누운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토닥토닥 소리. 얇은 솜이 폭신하게 느껴지는 이불 위로 주민의 손이 마치 아이를 재우는 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떨어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나직하게 웃은 그녀였다. 주민 씨도 얼른 자요.

고요히 퍼져 나오는 목소리에 주민은 자그맣게 답했다.

 

그대를 재우고 나면 나도 자도록 하지.”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못 이기겠다는 한 번 웃고는 조금 더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미리 잘 자요, 주민 씨.”

 

병실을 맴돌던 그녀의 인사가 주민에게 닿았다. 그에 주민이 따뜻하게 답했다.

그대도 좋은 밤 되길. 아침에 봐.

 

... 나직하게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의 인사가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느낀 그녀였다.

 

 

-

 

 

아직 어슴푸레한 빛이 감도는 이른 새벽, 주민은 작게 느껴지는 갈증에 눈이 뜨였다.

몸에 덮힌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작게 마련된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로 시선이 갔다.

 

심장이 쿵쿵 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주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고, 이마도 만져보고, 작은 입술까지 만져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였다.

 

 

-

 

 

주민의 호출에 달려온 의사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고는 상태를 확인 하더니 차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렸다.

함께 따라온 간호사는 작은 하얀색 천을 그녀의 얼굴에 덮어주었다.

 

“2016823일 아침 612, 운명하셨습니다.”

 

주민은 그 풍경에서 제 삼자였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에 주민은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만을 쳐다봤다.

 

그리고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는지

꽤 빨리 병실에 도착한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아마도 전화를 받고 울면서 왔으리라.

딸의 얼굴을 가린 천을 치운 부모님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을 치고 오열했다.

 

아가야, 눈 좀 떠봐라. 내 아가. 하나뿐인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가면 이 엄마, 아빠는 어찌 살라는 거냐.

 

조그만 병실을 꽉 채우는 소리에도 주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가만히, 천이 치워진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그대로였다.

 

 

 

 

-

 

 

 

딸을 잃은 슬픔을 한창 토해내고 겨우 진정이 되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주민은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그녀와 만나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묵묵히 주민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그녀의 부모님은 딸과 함께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

주민은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은 모르겠지.

자신이 그녀를 통해 얻은 행복과 위안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장례는 그녀가 있던 병원의 인근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슬픔에 지친 모습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부모와 그들의 지인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모여 있는 와중에 그녀의 또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문득 처음 만난 그날, 자신에게 병문안을 와줄 것을 부탁하며 또래 친구가 없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주민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로 어여쁘게 웃고 있는 얼굴.

작게 여문 입술을 열어 '주민 씨' 하고 부를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너는, 떠났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그동안의 기억에 주민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걸음마다 그녀의 향이 묻어 있었다.

그 향을 가슴 깊이 들이마신 주민은 마음 속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단정하게 두 번의 절을 올렸다.

 

그 곳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언제나 행복하기를.

 

이어지는 목례.

 

그리고... 그대가 보고 싶어. 꽤 많이.

 

목례는 조금 길었다. 묵묵히 그녀에게 보내는 인사를 마치고 느릿하게 고개를 든 주민은

사진을 잠시 응시하고는 뒤를 돌아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밖을 나오자 8월의 여름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매만지고 지나간다.

그 기분좋은 쓰다듬에 잠시 눈을 감은 주민은 아까 하지 못 한 마지막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사랑을 줘서 고마웠어. 나의 작은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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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dage

 

written by. Seon

 

Jumin

※끝부분에 약하지만 씬이 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동경한 비상(飛翔)은 금방 저지되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잡힌 작은 새.
애처로운 울음은 공기 중에 흩어지고, 괴이한 모양으로 꺾여 부러져버린 날개는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일탈은 길지 못 했다.

 

 

-

 

차가운 공기, 무겁게 깔린 어둠 속에서도 어지럽게 흩뿌려진 유리조각과 핏방울들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주민은 집 안을 응시하는 텅빈 눈을 바라봤다. 확연히 야윈 몸과 수척해진 얼굴.
따스함을 품고 있던 알멩이는 부서지고, 여기저기 흠집이 가득한 껍데기만 남은 듯 하다.
우습게도 날 벗어나려 한 뒤에야 그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니. 속에서 울컥하고 신물이 올라왔다.

 

"꽤나 금방 내 품에 돌아왔군."

 

어지럽게 흔들리는 마음과는 다르게 평이한 어조로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주민의 말.
소리는 허공을 가르며 울렸지만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예상했다는 듯, 혹은 체념했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띄우지 않은 채 무채색의 표정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 챈 주민은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구두를 신은 채였다.

단단하게 시공된 대리석 바닥에 마찰하는 구둣굽 소리가 소름끼치게 퍼져나가도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유리 부스러기가 까드득거리며 짓밟히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끌려가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는 듯 실이 늘어진 인형처럼 휘둘렸다.

그 모습에 표정을 굳힌 주민은 이내 어떤 방 앞에 도착한 뒤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움직임이 없는 주민이 이상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방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떨기 시작했다. 주민의 손에 잡혀 있는 손목이 가녀리게 바들거렸다.

여실히 느껴지는 두려움에 주민은 그녀를 데리고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내 것이라고 확실히 소유를 주장하겠어."

 

끼이익-

주민은 그녀가 갇혀 있었던 방의 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야."

 

 

-

 

 

방 안에 서서히 차오르는 열기.

 

저항하는 몸을 강압적으로 내리 누른 채 주민은 그녀의 안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원치 않는 침입에 놀란듯 강하게 옥죄어오는 그 느낌에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불을 입에 머금혀를 굴리던 주민이 고개를 들고 나즈막이 말했다.

 

"조금, 힘을 빼도록 해."

 

물론 난 이대로도 좋긴 하지만 그대가 다칠 수도 있어.

나즈막이 덧붙인 말에 고통만을 호소하던 그녀의 눈에 몇 가지 감정이 비추어졌다.

두려움, 분노, 그리고 원망. 이미 예상한 반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씁쓸함.

주민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대로 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놀란듯 크게 떠진 눈을 무시한 채 주민은 그녀를 탐하는데에 집중했다.

빡빡하게 닫힌 안을 억지로 열어 허리를 놀리면서 새하얗게 드러난 나신에는 여기저기 혀를 대기 바빴다.

 

처음에는 입술을 꾹 깨물고 소리를 참으며 주민을 받아내던 그녀였지만 이내 가녀리게 할딱이는 소리를 흘렸다.

자신이 낸 소리에 놀란듯 그녀는 바들거리는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지만, 그녀의 손을 치워 침대에 내리누르고는

좀 더 강하게 들이닥치는 주민으로 인해 자그마한 신음소리들이 가감없이 흘러나와 방 안을 울렸다.

 

"읏, 으응!"

 

수치스러워하는 얼굴로 작게 소리를 내뱉으며 나에게 휘둘리는 그녀라.

주민은 이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앞으로 다시는 이 곳에서 나갈 수 없게 내부 잠금장치를 조금 더 설치해야겠어.

옷은 전부 없애버릴까. 어차피 나 밖에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니 나신으로 있어도 문제는 없겠지.

내가 없는 동안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지켜봐야하니 CCTV 역시 설치해야겠군.

만일 다시 한 번 나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 때는 그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케이지를 주문하는 것도 괜찮겠어.

 

그녀를 향한 온갖 가학적인 상상을 하며 주민은 나즈막이 웃었다.

일단, 내 밑에 있는 그녀를 마음껏 취하는게 우선이겠지.

 

 

짙게 내리깔린 어둠은 끝을 모르고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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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봄

 

written by. Seon

 

Zen & You

 

 

봄이다.

 

비록 밖은 날카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느 겨울날과 다를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젠은 그렇게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도톰한 오리털 이불을 목 아래까지 푹 덮고 자는 여인은 봄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으니까.

저에게 포근함과 따스함을 선사하며 고운 손길을 내밀던 존재.

 

둘만의 영원을 맹세하며 결혼식을 올린지도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젠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 하는 나날이 달콤해 미칠 것 같았다.

아이처럼 자는 그녀를 안고 다시 잠을 청할 겸 눈을 감고 있자니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

 

 

그녀는 젠이 자주 가던 카페 '리엘' 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몸매.

커피를 만드는 실력이 꽤나 괜찮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렇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없는데다가

낯까지 많이 가리는지 카운터를 맡은 다른 직원이 자신에게 '와~ 또 오셨네요, 젠 씨!', '오늘도 같은거죠?' 라며

친근하게 대화를 걸 때도 그녀는 '어서오세요.'와 '안녕히 가세요.' 와 같은 딱딱한 인사만을 반복했기에

젠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리엘'에 들리며 커피를 마신지 한 달쯤 되던 날,

젠은 주연을 맡기로 했던 뮤지컬에서 갑작스레 캐스팅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신 대신 주연을 꿰찬건 이 쪽 업계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 솔직히 꽤나 비일비재한 일이긴 했다.

잘생긴 얼굴로 눈에 띄어서 근근이 단역이나 조연을 연기했던 뜨내기 뮤지컬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것보다는

연기력 인정 받고 인지도 있는 배우를 써서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했겠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끝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들끓는 감정에

주먹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쥐어버린 젠이다. 슬픔, 속상함, 그리고 분노.
자신이 가진 잘생긴 얼굴도 싫었고, 그 얼굴로 인해 자신의 연기를 온전히 바라보지 않고 저평가 해버리는 업계 사람들도 신물이 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미칠 것 같은 느낌에 젠은 충동적으로 밖에 나와서 '리엘'로 향했다.

젠은 '리엘' 이 가진 특유의 안락한 느낌을 좋아했다. 추가적으로 카페 안에 충만하게 풍기는 갓 볶아낸 커피 원두의 향은

마치 아픔도, 상처도 다 끌어안아줄 것만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기에

그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면 젠은 위로받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딸랑-
"어서오세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늘 똑같은 인사가 젠을 반긴다. 그런데 활기찬 목소리 하나가 줄었다.

오늘은 저 조용한 직원만 근무하나보네.

평소 같으면 하하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을 젠이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굳은 얼굴로 고개만 살짝 숙이자 약간 놀란 듯한 눈의 직원. 표정이 나타나는걸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 젠이었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딱딱한 말투로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하고는 한산한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자리를 잡았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직원이 가져온 커피가 젠의 테이블에 놓였다. 달콤하고 은은한 헤이즐넛.

기분좋게 풍기는 향과는 상반되는 자신의 감정상태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익숙하게 커피 잔을 들려던 젠은

작은 손이 우물쭈물하다 테이블에 슬쩍 올려놓은 붉은색 꽃 한 송이에 시선이 멈췄다.

 

"... 이 꽃은 뭐죠?"
"저... 금어초라는 꽃이에요."
"꽃의 이름을 물은게 아니라 왜 주시는 건지 물은겁니다만..."

 

꽃을 응시하던 시선을 살짝 올려서 직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은 젠이다.

 

"아! 그, 그게... 젠... 씨가 힘들어 보이셔서..."
"그래서 이 꽃을 주는거라고요?"

 

근데 이건 어디서 가져온... 꽃의 출처도 함께 물으려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조그맣게 고인 물에 시선이 간 젠이다. 이건 왠 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스쳐지나간 생각에 카운터에 놓여있는 화병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한 송이가 부족한 기분인데...

찝찝한 느낌에 화병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듯한 표정과 불긋하게 뺨에 피어오르는 열꽃. 저 화병에서 한 송이 빼온 것이 맞나보네.

젠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꽤나 귀여운걸?

젠이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로 직원은 그저 꽃을 화병에서 빼온걸

들켰다는 것만 신경쓰이는지 고개를 푹 숙여 젠의 시선을 피한 채 작은 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원래 금어초의 꽃말은 탐욕, 오만이지만...

붉은색의 금어초는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격려라. 손을 뻗어 꽃잎을 만지작거리던 젠이 나즈막이 중얼거렸다.

 

"꽃말이 너무 다정해서 좋아하는 꽃인데... 젠 씨에게 드릴게요."
"..."
"저...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다 잘 될 거에요. 그러니까 기운내세요."

 

그, 그리고 꽃병에서 빼온 꽃을 드린 건 죄송해요.  

아마 젠이 '리엘' 에 들린 이례로 가장 많은 말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직원은

횡설수설 마지막 사과까지 마친 뒤 목례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카운터 뒤로 자리를 옮겼다.

꽤나 부끄러웠는지 자신이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있는 직원을 젠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슬핏 붉어진듯한 목덜미, 이미 양껏 달아오른 두 뺨.

누군가가 힘들어보인다고 화병의 꽃까지 빼서 건내주며 위로를 건네주는 '여자' 라.

 

처음으로 젠이 그녀를 카페의 직원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서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

 

 

"으으응..."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이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뒤척이자 젠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매끈하게 펴져 있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안 좋은 꿈을 꾸는 건 아닐지 걱정 되어서 좀 더 꼭 끌어안고 도닥여주자 금새 베시시 웃더니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드는 그녀였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에 젠 역시 입가에 미소를 베어물었다.

 

오랜만에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었더니 여운이 남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좀 더 그녀를 끌어안고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려는데 문득 시계에 시선이 닿은 젠이다. 1시 27분.

평소 같으면 진즉 일어나서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까지 먹고도 남았을 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던 젠은 결국 그녀를 깨우기로 마음 먹었다.  

 

"자기야~ 점심 먹어야지~"

 

귓가에 대고 이야기 하자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지 잠에 빠져 있는 채로도 몸을 슬쩍 뒤척이는 그녀였다.

 

"일어나자~ 응?"

쪽쪽-

재차 달콤한 목소리로 깨워보지만 움찔거리면서도 눈을 감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에

젠은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말랑한 귓불, 포동하게 살이 오른 뺨, 가지런히 자란 눈썹은 물론이고

잠에 취해 감긴 눈꺼풀, 매끈한 이마, 살짝 벌려진 채 작은 숨결을 내뱉는 입술까지 전부.

다정하게 쏟아지는 키스세례에 결국 꼬물꼬물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젠을

멍하게 마주보다 두 어번 눈을 비비더니 베싯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젠 씨, 일찍 일어났네요?"

평소 일어나는 시간대를 생각해봤을 때, 아직 아침이 지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긴, 늘 8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였기에 오늘같이 침대에 파묻혀 늦잠을 자는 날은 꽤나 이례적이긴하다.

하지만 내 사랑스러운 공주님.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는걸?

 

"벌써 1시가 넘었어. 우리 자기, 더 늦기 전에 밥 먹어야지?"

"에...? 1시요?"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난거지? 의아하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젠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휘감는 부드러운 감촉.

 

"일찍 일어나는 공주님도 좋지만 나는 잠꾸러기 공주님도 엄청 사랑스러운걸?"

 

젠이 내뱉은 애정 어린 말에 더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던 그녀는

문득 젠이 아직 밥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는 '아, 맞다!'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젠 씨 식사를... 미안해요. 배 많이 고프죠? 

 

푸흐흐. 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갑자기 미안한 표정을 짓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내 식사를 못 챙겨서 그런거였나?

젠은 그녀를 꼭 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안 먹어도 상관 없는데 우리 자기 배고플까봐 그러지."

 

별 것도 아닌 일에 진심을 담아 미안해 하고, 늘 자신부터 생각하는 모습.

연애를 시작한 순간부터 결혼을 한 지금까지도 빠짐없이 봐온 그녀의 행동이건만

젠은 매번 그녀의 배려가 전해져 올 때 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뭉클함, 고마움, 애정 등의 감정이 뭉근히 섞여서 가슴에 스며드는 그런 느낌.

 

"아! 저도 괜찮은데..."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괜찮다는 말을 한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슬쩍 고개만 들고는 젠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조금만 더 같이 누워있으면 안 돼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민망한 대사라고 생각했는지 젠에게서 후다닥 떨어져서

이불을 폭 끌어당겨 덮어 쓴 그녀가 조심스레 눈만 내놓은 채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그녀의 말을 들은 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본인이 얼마나 대담한 이야기를 했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그녀의 몸짓이나 말 한 마디에 휩쓸리고 있는 젠에게는 저 말은 꽤나 유혹적인 대사였다.

물론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젠은 웃음을 멈추고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흐음~ 꽤나 적극적인걸, 우리 자기? 밤에 하는 것만으론 부족한거야?"

"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화들짝 놀라며 손사레까지 쳐가며 부정하는 그녀를 보고 젠은 다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아, 너무 사랑스러워. 큭큭거리며 자신을 다시 끌어안는 젠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젠을 밀어내며 슬쩍 삐진 듯한 어투로 외쳤다.

 

"젠 씨, 절 놀린거죠!"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응?"

 

진~짜 잘못했어, 자기야. 자신을 달래며 사과하는 젠을 보자

언제 투덜거렸냐는듯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그녀였다. 조금 더 삐져있으려고 했는데!

아, 나는 젠 씨한테 너무 약해.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에이,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젠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자신을 마주 안아오는 젠의 손길을 느끼며 싱긋 웃고는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

 

"자기야, 자는거야?"

 

자신의 허릿께를 안고서 품에 파고든 몸을 느릿하게 토닥이자

점점 고르게 변해가는 그녀의 숨소리에 젠이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젠은 그녀가 편안히 자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볼에 입을 맞추고 자신 역시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꿈에서마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부부의 알콩달콩한 일상이 머물던 침실은 금새 조용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어느 따뜻하고 평화로운 1월의 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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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ession

 

written by. Seon

 

Jumin

 

 

종달새가 날아가버린 집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북할 정도로 낮게 깔린 어둠 속을 날카롭게 헤집어봐도 그가 기다리던 존재는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지시한 주민은 전화를 끊고 여기저기 널부러진 흔적의 잔재들을 바라보았다.

바스러진 유리조각, 번져 있는 핏자국. 그가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사준 그녀의 옷들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찢어져 있었다.

주민은 문득 그 옷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옆을 벗어난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그런건 중요치 않으니까.

 

그녀를 뼈째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한 약간의 분노를 담은 채,

주민은 구두를 벗고 무심히 맨발로 걸음을 옳겼다.

발 디딜 틈 없이 흩뿌려져있던 자잘한 유리조각들이 박혀와도,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쾌감이 느껴졌다.

그 작은 손으로 힘겹게 내리쳐 부수었을테지. 비쩍 마른 몸으로 유리를 부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부엌에 도달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정갈하게 줄맞춰 세워져있는 와인과 양주.

주민은 잠시 안을 눈으로 훑다가 망설임 없이 구석에 박혀 있는 양주 한 병을 꺼내들었다.

바카디 151. 꽤나 독하다고 정평이 난 양주다. 그리고 자신의 28번째 생일에 그녀가 준비한 선물이기도 하고.

 

'주민 씨는 열정적인 사람이니까 이 양주가 딱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준비했어요. 생일을 정말 축하해요.'

 

포근한 눈빛으로 한 점 티없이 말갛게 웃어주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민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 때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는 나날들을 보냈지. 눈을 맞추고, 살을 맞대고, 감정을 나누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번 잘못 맞물린 두 개의 톱니바퀴는 끼긱끼긱 억지로 돌아갔고,

고통을 호소하던 약한 톱니바퀴 하나 결국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어떻게 하면 그대가 날 떠나지 않았을까.

 

삐- 삐-

잠시 과거를 되짚어나가던 주민은 냉장고에서 울리는 경보음에 다시 현실을 마주했다. 피가 빠르게 식고, 머리는 냉정해졌다.

그녀는 창 밖으로 날아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입가에 조소가 머물렀다. 역시, 다리를 부러트렸어야 했나.

끊임없이 차오르는 가학적인 생각에 주민은 비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바카디를 벽에 내던졌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부엌에 가득찬 독한 알코올 향과 병의 파편들.

 

부엌을 나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린 발바닥살이 토해내는 핏방울은 그녀의 흔적과 덧대어 온 집 안에 묻어 나고 있었다.

마치 그녀와 내가 엉켜 있는 모습같군. 그 생각에 미치자 순간 핏방울이 꽤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주민이다.

그렇기에 좀 더 힘을 주어 발을 딛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결벽증이 의심될 정도로 깔끔함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과는 꽤나 모순된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는 그녀와 얽힌 순간부터 원래의 한주민으로는 자리 할 수 없었으니까.

 

삐리리리- 삐리리리-

적막을 깨고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주민은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찾았나?"

「네, 이사님. 2시간 전에 부산행 기차를 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좋아. 곧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주민의 입가에는 미소가 들어찼다.

 

조금만 기다려, 나의 종달새.

곧 그대를 찾으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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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첫사랑이여

02

 

written by. Seon

 

Zen & You

 

 

솔직히 내일도 놀러온다는 그 말에 기쁘긴 했지만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다.

원래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기에 부득이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아무리 어린 시절 부터 알고 지냈다지만

근 10년간 못 본 소꿉친구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건 아니니까.

그렇기에 반쯤 기 대를 버린 채로 집 앞 돌담에 걸터앉아있는 내 앞에 류 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조금 놀라버렸다.

 

"뭐야, 내가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나도 모르게 진짜 왔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류 현이 한 마디 하더니 날 따라 돌담에 걸터 앉았다.

 

"설마 날 약속도 제대로 안 지키는 그런 시시한 남자로 본 건 아니겠지?"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차마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 하고 말 끝을 흐리며 얼버무렸다.

시시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꼭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건 사실이니까.

 

"뭐야, 왜 대답을 제대로 못 해?"
"..."
"와~ 진짜 내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한거야? 너무한다, 너."
"...미안해."

 

농담처럼 던진 듯한 말에 대답을 못 하자 눈을 크게 뜬 류 현이 내 어깨까지 붙잡고 흔들며 대답을 요구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슬쩍 눈을 피하는 것 뿐. 그런 내 행동이 꽤나 충격이었던지 류 현이 큰 소리로 나에게 너무하다고 외쳤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충분히 서운할 법한 상황이라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치자 더더욱 늘어나는 죄책감.

죄인인 나는 그저 옆에 앉은 류현의 옷깃을 슬쩍 잡은 채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선처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예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고양이 마냥 간절하게 쳐다보면서 시리 팔뚝도 콕콕 찌르며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자

그런 나를 입 꾹 다문 채로 쳐다보던 류 현이 이내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안한거 맞지?"
"응응, 그럼!"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미안하다는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언가 깊게 생각하던 류 현이 내 눈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내뱉었다.

 

"그럼 나, 아이스크림 사줘."

 

 

*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으려고 삐진 척을 한 건 아니었을까?

내 잘못에 대한 대가로 아이스크림은 엄청 싸다고 생각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니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

바로 얼굴이 풀려서는 내 손목 부근을 잡고 씩씩하게 걷는 류 현을 보고 있자니 저런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혹시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 지갑을 거덜내려고 하는건가?

문득 얼마 전에 시내에 새로 생긴 브랜드 아이스크림 가게가 떠올랐다.

친구랑 같이 호기심에 가봤다가 가격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서 아이스크림 한 번 먹고 근 일주일을 빈곤하게 살았었는데...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머리를 푸스스 흔들고는 그냥 류현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그래, 그까짓거. 이번엔 한 이주일 정도만 힘들게 살면 되겠지.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내가 무색하게도 류 현은 그 휘황찬란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쳐 갔다.

'그러면 롯데리아나 맥도날드 정도 가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 곳도 아니라는 듯 지나치고는 이젠 아예 시내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아이스크림 가게는 안 갔으니 지갑을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걸까?

 

만하면 도착 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고 했으나 목적지도 모르고 아무 말도 없이 걷기에는 날이 참을 수 없이 더웠다.

그냥 가만히 앉은 채로 더운건 그럭저럭 즐겨도, 몸을 움직일 때 더위가 증폭되는 느낌은 참을 수 없이 싫어하는지라

결국 류 현의 옷을 쭉 당겨서는 멈춰세웠다.

 

"류 현, 어디까지 가는거야?"
"응? 아, 미안미안. 너 걷는거 싫어하는걸 깜빡했다. 너무 멀지?"

 

살짝 찌푸려진 얼굴과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가닥가닥 젖은 내 앞머리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금새 미안한 표정으로 변하는 얼굴.

그러더니 앞머리를 살살 정리해주고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듯 이야기 해준다.

 

"... 알았으니까 얼른 가자."

 

날 챙기며 내뱉는 말과 행동이 꽤나 다정하기도 했고, 어쨌든 처음에 류 현을 믿지 못 한 죄도 있으니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자 금새 싱글 웃더니 이번에는 손목이 아닌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아까 손목이 잡혀있을 땐 몰랐는데... 류 현은 손이 찬 편인 것 같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뜨끈한 내 손과 류 현의 차가운 손이 맞닿으니

꽤나 좋은 체온으로 섞이는 것이 느껴져서 아까와는 다르게 슬쩍 미소를 띈 채로 류 현을 따라 갔다.

 

확실히 기분이 나아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주변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싱그러운 빛을 머금고 우직하게 자란 나무들, 칠이 다 벗겨진 간판이 눈에 띄는 낡은 문방구에 흙먼지 가득한 운동장까지.

 

"어? 여기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아냐?"
"기억하고 있었네? 거기 맞아."

 

뭔가 굉장히 낯익은 풍경이라는 생각에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니 역시나 맞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지도 못 한 장소에 와서 얼떨떨한 마음으로 학교만 빤히 쳐다보며 걷다가 갑자기 멈춰선 류 현을 못 보고 등에 코를 박아버렸다.

꾸욱 눌려서 그런지 아프다는 느낌이 들어서 코를 만지며 앞을 쳐다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베이커리.

말이 좋아 베이커리지, 빵보다는 초등학생들의 입맛을 노려서 와플, 슬러쉬, 핫도그 등의 군것질 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거기에 협소하지만 들어와서 먹으라는 듯 테이블에 의자까지 있고.

 

여기가 맞냐고 물어보려했지만 이미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까지 잡아버린 류 현을 보고 쭈뼛대며 따라들어갔다.

짤랑- 하고 들려오는 종소리. 그 뒤로는 꽤나 푸근해보이는 아주머니가 가게로 들어오는 날 향해 인사해주셨다.

그에 나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류 현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너 여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거였어?"

 

'1개 1000원' 이라 적혀있는 A4용지를 붙인 채

가게 한 쪽에 놓여져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바라보면서 물어봤다.

 

"응. 우리 어릴 때 여기 자주 왔잖아. 기억 안 나?"

 

그랬었나? 여유롭게 가게 안을 둘러보는 류 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가게 상태만 봐도 꽤 오래된 느낌이 들긴 한다. 빛 바랜 테이블보에 삐뚤빼뚤한 낙서가 가득한 시멘트벽...

얼핏 하교 할 때마다 이런 느낌의 가게를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류 현과 같이 동전을 모아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 먹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우리 용돈 모아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나눠먹고 그랬던 곳! 맞지?"
"오~ 기억력이 아주 나쁘진 않네?"

 

잊고 있었던 과거를 한 조각 떠올린게 기뻐서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날 보고

류 현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놀랐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딱 봐도 날 놀리는듯한 제스처.

여기서 답을 해봤자 분명 어떻게든 더 장난을 칠 것이 분명하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일단 아이스크림이나 사줘야지.

 

진열된 빵들을 정리하고 계시던 아주머니에게로 가서

2000원을 꺼내어 소프트 아이스크림 2개만 달라고 말씀드렸다.

몇 가지 버튼을 띡 누르고 레버를 당기자 금새 뽑아져 나오는 새하얀 아이스크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돈을 드리고 아이스크림을 받아 자리로 돌아와서 류 현에게 하나를 건냈다.

 

어디서나 사먹을 수 있는 흔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지만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장소에서 먹는건 뭔가 확실히 다르다.
그 덕에 나도 모르게 빙긋빙긋 웃음이 나오려는데 문득 느껴류 현의 시선.

건내준 아이스크림은 먹지도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나 쳐다보지 말고 빨리 먹어. 녹으면 아깝잖아."
"그래그래, 알았어."


뭔가 민망한 느낌에 더듬더듬 류 현에게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라는 말을 건냈지만

마치 애를 보듯이 웃으며 쳐다보는 류 현이다. 다정해진건 좋지만 저런 애취급은 사양인데...

한 마디 하려 했지만 그냥 다 귀찮아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나 할짝였다.

 

"...야."
"응?
"넌 항상 그런 얼굴로 날 기다리는거야?"
"그런 얼굴?"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아이스크림에 집중하고 있는데 문득 류 현이 고개를 들고는 굉장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돌담에 앉아서 류 현을 기다리던 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얼굴이란건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바보같은 얼굴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 아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

 

내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류 현은 고개를 저 한 마디만 하고는 말을 멈춘다.

그냥 해본 말이라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는걸?

의아한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자 류 현이 그런 내 눈을 마주보다가 갑자기 씨익 웃는다.

 

"너 말야. 내가 잘생겨서 계속 보고 싶은건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지긋이 쳐다보면 좀..."

 

...아까 그 진지한 표정은 어디로 치웠는지 금새 자아도취에 흠뻑 빠진 말이나 내뱉는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젓고 아이스크림 콘만 오물거렸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저 나르시즘 가득한 멘트는 적응이 안 되네.

아예 대꾸를 안 하겠다는 듯한 내 모습에 '흐음' 하는 소리를 낸 류 현은

아무래도 내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겠다고 느꼈는지 더는 말하지 않고 나를 따라 마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양이라 몇 분도 채 안 되서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우리는

서로 별 말 없이 자연스레 일어나서 가게를 나섰다.

이젠 어딜 가야하지? 카페를 갈까? 근데 방금 아이스크림 먹었으니

또 디저트 먹기는 그럴텐데... 밥을 먹어야 하나?


"...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미안해."

 

조용히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던 내 옆에서 류 현이 시계를 보고는 슬핏 인상을 찌푸리더니 약간 아쉬운 듯한 말투로 말한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가는거야? 나 역시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고 헤어지기는 아쉽지만

내가 그런 티를 내면 괜히 더 미안해 할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류 현의 어깨를 툭툭 치곤 말했다.

 

"다음에 더 오래 있으면 되지, 뭐."

 

그에 슬쩍 웃어준 류 현은 내 머리를 쓸어넘겨주면서 내일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는 혼자 휘적휘적 걸어갔다.

오늘도 꽤나 바쁜가보네. 멀찍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코 끝이 찡해졌다.

고 있어도 불안한 기분. 류 현이 들으면 또 날 못 믿냐며 투덜거리겠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류 현이 전부 안 보일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래, 내일 또 온댔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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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