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written by. Seon

 

707

 

 

내일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화창하니 가족끼리 나들이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일기예보의 말에

신경질 적으로 TV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던졌다. 거실을 나뒹구는 요란한 소리, 짙게 흘러나오는 한숨.

마음에 품은 정인이 한 줌의 재가 되어도,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 늘 새로운 아침과 밤을 맞이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보낸 1년 전의 그 날에 얽매여 있는데.

 

답답한 비소를 지으며 내다본 창문 밖에는 언제나와 같이 하염없이 밝고, 푸르른 하늘이 존재했다.

비라도 오면 좋을 텐데. 맹렬한 기세로 따갑게 내리치는 거센 비를 맞다보면, 당신을 온전히 보낼 수 있을까.

당신이 떠난 것이 다 나 때문이라는, 이 죄책감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절로 지어지는 헛헛한 웃음에 입술을 짓깨물며 일어섰다. 발길이 향한 곳은 거실 한 편에 있는, 먼지가 그득하게 쌓인 책장.

손을 뻗어 진한 나무 색깔을 띠고 있는 앨범을 꺼냈다. 당신과 나, 그리고 태어나지 못 한 작은 생명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는 앨범.

함께 데이트를 가고, 밥을 먹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나날들이 찍혀 있었다.

그 때의 기쁨과 추억을 소중히 매만지며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며 넘기다보니 금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 곳에 외로이 꽂혀있는 작고 까만 사진 한 장. 처음으로 아기가 생겼음을 듣고, 병원에서 받아왔던 초음파 사진이었다.

예상치도 못 했던 소식이었기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조금은 급하면서도, 황홀한 기분으로 결혼식을 준비했었는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고로, 모든 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 교통사고였다. 표면상으로는. 하지만 그 사고는 의도된 살해였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쪽은 자신의 죽음을 노렸다, 세상에 드러내지 못 할 일을 숨어서 처리 하던 정보원이 갑작스레 손을 떼고 모든 걸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으니 조용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테고, 그랬기에 자신이 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이받았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 곳에 있었더라면, 대신 죽었더라면.

사랑하는 당신은 살았을 텐데, 그리고 아기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어 눈에 가득 담았다.

꽃망울도 머금지 못 한 채 사그라진, 당신과 나의 정애의 결실. 누구보다 어여뻤을, 우리의 아기.

 

그리움과 허망함은 진득한 눈물이 되어 손등에 떨어졌다. 너무도 그립고 만나고 싶었다.

그녀도, 아기도. 단 한 순간도 생각 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좀 더 가슴 아리게 보고 싶었다.

내일이 당신의 기일이라 그런 걸까.

 

슬픔에 잠식 되어 척척하게 젖은 앨범을 덮었다. 물기가 어린 눈가를 닦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급격하게 몰아닥치는 어지러움. 중심을 잡아보려 했지만 머리가 망가진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 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는 몸, 천천히 일렁이며 암흑으로 물들어가는 시야.

 

 

아아,

당신이,

보고 싶어.

무척이나.

 

 

-

 

 

깨질 것 같이 지끈거리는 머리로 인해 저절로 정신이 들었다. 천천히 떠본 눈은 뿌옇고, 또 뻑뻑했다. 기절했던 건가.

딱딱한 원목바닥이 가까워져 오면서 부딪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이후로 기억이 없다.

다행이도 몸이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묘한 두통과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래도 머리를 제대로 박은 모양.

기절해 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래저래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음도, 그리고 몸도.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직격으로 맞닿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마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러자 손에 느껴지는 것은 부어올랐을 피부가 아닌,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작은 수건. 젖은 지 오래 안 된 듯 여전히 축축했다.

이건, 뭘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눈을 감은 이후로 변변찮은 지인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그를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당황스러운 감정에 누워 있는 상체를 일으켰는데, 엉덩이 아래 닿는 곳이 푹신했다. 그에게는 조금 작은 듯한 싱글 사이즈의 침대.

그 위에는 분홍물이 옅게 들어있는 솜이불과 노란 꽃이 여기저기 수놓아진 새하얀 베개가 놓여있었다.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한 풀빛의 벽지,

햇살을 한 가닥씩 촘촘히 엮은 느낌의 레이스 커튼, 깔끔하게 정돈 된 책상.

그리고 방 안을 아련하게 맴도는 그리운 레몬그라스의 향.

 

이곳 은 분명히 그의 집이 아니다. 그렇기에 낯설면서도, 한 편으로는 더 없이 낯이 익었다.

내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이제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굳어버린 머리로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어설프게 살짝 닫혀있는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한없이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발소리.

비좁은 틈새로 작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차 크게 번지고,

이내 문이 활짝 열리자 작은 체구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네요?”

 

그녀였다. 이슬을 머금은 듯 고운 목소리, 밤하늘을 한 폭에 옮겨 담은 느낌의 까만 눈동자. 따사로운 눈빛까지.

한 시도 잊을 수 없던 얼굴. 이건 꿈인 걸까. 신이 나를 가엽게 여겨 잠시 당신을 내 꿈에 들여보내 주신 걸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아릿한 통증, 그녀에게서 풍겨져오는 상큼쌉싸름한 레몬그라스향까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머리가 짓누르듯 쑤셔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틀거렸고, 놀라서 다가온 그녀의 손은 그의 어깨를 부축하듯 잡았다.

 

, 갑자기 일어나면 안 돼요!”

 

그 쪽,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 같아요. 그렇게 움직이면 분명 어지러울 거예요. 걱정을 담은 말투였지만 호칭은 생경했다.

그 쪽이라, 이곳 의 당신은 나를 모르는 걸까.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문점.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떼고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분명, 여기는 그녀의 집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이 여자도, 아마 내가 사랑한 당신이겠지.

혼란스러운 감정에 잠시 멍하니 그녀의 눈만 마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 그 쪽이 저희 집 앞 복도에 쓰러져 있었어요.”

 

처음에는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까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고,

큰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아서 제 방에 눕혀놓은 거예요.”

 

원래 같으면 아무리 다쳤어도 낯선 사람을 집에 들여오는 일은 절대 없을 텐데, 그 쪽, 제 애인이랑 닮았거든요.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예비신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남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녀의 말을, 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애인, 그리고 결혼.

 

, 이거 세영 씨가 들으면 질투하려나?”

 

포근한 웃음을 머금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건, 내 이름. 정말 당신이구나. 당신이 맞구나.

언젠가 깨야 할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신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니.

주체 할 수 없이 울컥거리는 감정을 다독이고, 또 다독이느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그녀에게 들킬까봐 시선을 돌리다 문득, 구석의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년 그녀의 생일날, 같이 놀이공원을 갔을 때 찍었던 사진 중 한 장.

그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에 액자가 있는걸 알았는지 그녀는 걸음을 옮겨 액자를 들고는 그에게 가져왔다.

 

", 마침 사진도 있네요. 여기, 붉게 염색한 머리가 제 애인이에요."

 

사진을 놓고 비교 하니까 확실히 더 닮았네요. 물론 그 쪽은 머리도 더 길고 제 애인보다는 살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가 건네주는 액자를 손에 꼭 쥐고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진으로 본 과거의 최세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당신과 있을 때, 나는 저런 표정을 지었었구나.

까마득한 기억 속을 헤매며 더듬는 것 같았다. 1년 사이에 달라진 건 딱 하나, 당신의 존재뿐인데

행복했던 모습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멍하니 사진만을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머리는 이제 괜찮아요?”

 

머리라. 여전히 지끈거림은 남아있었지만 확실히 아까만큼 심한 건 아니다.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긴요. 많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요.”

 

, 맞다. 그 쪽 자고 있을 동안 식사 준비 하고 있었는데, 괜찮으면 밥 먹고 가요.

베풀어지는 그녀의 선의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미리 불을 올려두었는지 보글보글 입맛을 돋우는 소리를 내며 끓는 냄비.

멀스멀 피어오르는 구수한 메주 냄새는 부엌과 거실을 한가득 채우며 떠돌아다녔다,

된장찌개, 그녀가 아직 살아있을 적, 자주 해주던 요리였다.

 

그리운 향에 취해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쳐다봤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밥통에 갓 지어 올린 따끈한 밥을

고르게 뒤섞느라 분주한 모습, 조용히 턱을 괸 채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 천에 하얀색과 검정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펑퍼짐한 원피스.

 

임신... 한 거예요?”

 

작게 내뱉어진 물음에 그녀가 밥을 뜨다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의문의 빛을 띄고 있는 시선에 그는 조용히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옷, 임부복이잖아요.

 

,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 임부복은 다 세련되게 디자인 되서 배가 안 나오면 임산부인줄 잘 모르던데. 눈썰미 좋으시네요.

누군가가 아기가 있음을 알아봐준 것이 기쁜 지 그녀는 얼굴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피어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를 위해 직접 골라서 선물했던 옷이니까.

 

푸른 도자기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고, 뜨겁게 끓는 찌개그릇도 조심히 옮기고,

식탁으로 자잘한 반찬들을 나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수저를 내려놓고는 식탁 앞에 앉았다.

이제 먹어도 돼요. 묘한 기대가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작게 웃음 짓고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술 퍼서 입에 넣었다. 되지도, 질지도 않고 적당히 쫀쫀하게 잘 익은 쌀밥.

이어 두부와 호박이 듬뿍 들어간 그녀의 된장찌개도 한 숟갈.

 

맛있네요.”

 

입안을 맴도는 진하게 우러난 된장 맛, 그녀의 솜씨 그대로였다.

 

제가 된장찌개 하나는 잘 끓이거든요.”

 

, 입덧이 좀 심한 편인데 제 된장찌개는 맛있어서 그런지 언제 먹어도 술술 넘어 가더라고요.

얼마나 맛있으면 애기도 계속 좋아하겠어요.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말에 그가 푸스스 웃음을 뱉었다.

꿈에서나마 그녀와 재회하고, 처음 내보이는 웃음이었다.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그녀는 좀 더 활짝 웃으며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요새 보는 TV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새로 시작한 취미, 좋아하는 책에 대한 것까지.

 

그녀는 대화 초반에는 사사로운 일상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하다가, 종반에 가서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만을 잔뜩 꺼내었다.

아기가 생긴 지는 4개월이 조금 안 되었고, 배가 늦게 나오는 편이라 사람들이 아직 임산부인줄 잘 모른다는 것, 성별은 예쁜 공주님.

1년 전의 그녀와 이미 나눈 적이 있었던, 익숙한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그는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표현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 아기 이름도 생각해뒀어요.”

 

이름이라니, 그녀와 아기의 이름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눈빛을 보지 못 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름을 짓기에는 조금 빠를 수도 있지만, 태명보다는 일찍부터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었거든요.”

 

세영 씨에게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에 깜짝 놀라게 하면서 알려주고 싶어서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굴 한 번 보지 못 하고 떠나보낸 아기의 이름.

태어나려면 두 손가락에도 다 꼽히지 않을 만큼의 밤을 보내야 하는데, 당신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구나.

눈물이 목에 가득 메여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을 연 순간, 하염없이 흘러나올 것 같았기에.

 

깊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꽉 쥔 채로, 간신히 물음을 던졌다. 이름, 어떤 건데요?

끊어지듯 흘러나온 그의 말에 오물오물 밥을 삼킨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윤이요.”

 

서윤이라고 지을 거예요. 아름다울 서(), 윤택할 윤().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 마음도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서윤, 서윤. 한없이 곱씹게 되는 이름이었다. 당신과 나의 아이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녔구나.

 

이름을 이야기 해주며 아기가 숨 쉬고 있을 배를 천천히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은 가까이 있었지만, 또 한없이 멀었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묵묵히 슬픔을 삼킨 그는 잔잔히, 축복의 말을 건넸다.

 

그 아기, 분명 예쁠 거예요.”

 

아마, 당신을 많이 닮았을 테니까요.

그 말에 놀라움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최고의 칭찬이네요.

기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답에, 그는 그저 작게 미소 짓고는 마저 식사를 재개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당신.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걸까.

행복하고 고마운 한 편, 마음에 앉은 어두운 응어리는 치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이 반대로 그녀가 가져야 할 행복을 좀먹었다는 죄악감. 당신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정말 기뻤을까.

그 생각에 다다르자 우뚝, 젓가락질이 멈춰졌다. 그리고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건데요?”

 

아무거나 물어봐도 괜찮아요. 온화한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며 뜸을 들인 그는, 이내 천천히 질문을 뱉었다.

 

“...당신, 행복해요?

 

애인과 있으면서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한 거 맞아요? 그 질문에, 부산스레 밥상을 치우던 그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조금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겨진 작은 의아함.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져 허탈한 웃음을 한 조각 내뱉었다. 예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앞에 있는 그는 그저 이방인, 혹은 오늘 하루 돌봐주게 된 낯선 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 한 번도 보지 못 한 애인과 행복하냐고 묻는다니. 분명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하며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아니,

비겁하게도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꺼내지 못 했던질문이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다. 나랑 있으면서 정말 행복한 걸까.

혹시 나로 인해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힘들고, 괴로운데, 당신이라는 사람이 너무 착해서,

아무것도 없는 내가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겨져 그저 동정심에 가만히 품어주고 있던 건 아닐까.

 

애매하게 이어지는 침묵. 1초가 영겁의 시간인 것 마냥 느껴졌다. 초조함을 품은 심장은 쿵쿵 뛰며 약하게 아려왔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 행복해요.”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 그는 가만히 그녀의 발치만 쳐다보았다.

대답에 대한 고마움, 안도감,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 박힌 죄책감과 미안함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더 행복 했을 수도 있었는데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 질문은 그가 품고 있던 마음의 짐이었고, 또한 저열한 욕심의 증거였다.

나에게 다가오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계속해서 밀어냈다면,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국 내 손 안에 붙잡아버렸다.

 

만일 누군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세영 씨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고를 거예요. 또박또박한 발음은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가슴 속으로 뻐근하게 차오르는 뭉근한 감정. 그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다른 질문을 꺼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아픈 질문.

 

그 사람으로 인해... 죽는다고 해도요?”

 

죽음. 실제로 나로 인해 맞이한, 당신의 죽음. 가슴에 남은 생채기가 쓰라리고, 슬픔이 몰려왔다.

그는 눈을 꾹 감았다. 그녀가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한 시라도 빨리 알고 싶었다. 최세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진실한 감정, 생각, 모든 것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들려왔다.

 

나는 괜찮아요.”

 

그래도 죽기 전까지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봄 햇살 같은 온기가 가득 담긴 그녀의 목소리.

 

세영 씨는, 저의 전부니까요.”

 

...당신도 나의 전부야.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꺼낼 수 없는 대답을 따갑게 목구멍으로 삼키고는, 감은 눈을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아아, 고맙고, 또 고마운 내 사람.

평생 잊지 못 할, 나의 당신. 울컥거리며 메이는 목으로 그녀에게 말을 전하려는 그 순간, 작은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 어지럼증은 곧 갑작스레 몸을 불리며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안개가 끼듯 점차 흐려지는 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 당신과 다시금 헤어질 시간이구나.

 

꾸역꾸역 삼키고 참았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고마워.

행복하게 있어줘, 그 곳에서.

언젠가 당신이 나를 부르는 날이 오면 꼭 만나러 갈게.

 

그 때는,

다시 함께 있자.

 

 

-

 

 

스르르 눈이 떠졌다. 텅 빈 거실, 차가운 바닥. 멍하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었다. 아무도 없이, 오로지 그만 존재하는, 그의 집. 

미처 내보내지 못 한 눈물 한 줄기가 그의 얼굴선을 따라 주륵 흘러내렸다.

 

그 꿈은, 당신이 준 선물일까.

더 이상 아파하지 말라는 걸까.

 

젖은 눈가를 손으로 닦아내며,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앨범을 주웠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너무나, 사랑해.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미약한 중얼거림.

우두커니 서서 애정을 읊는 그의 주변으로 익숙한 레몬그라스 향이 모여 들었다.

 

 

 

반응형
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