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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마거리트가 곱게 심어진 화분을 품에 안은 채,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던지고 간

반짝이는 은발을 지닌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 인사치레라고 생각 했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이 슬며시 부풀어 올라 기약 없는 약속을

가슴 한 편에 품고 지낸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꽃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입구에 달린 분홍색 종이 자그맣게 흔들리며 소리를 내면 혹시 그 때의 그 남자가 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

가게 안의 작은 창고에서 꽃을 정리하다가도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왔다가 실망한 것도 수차례.

덕분에 꽃을 사러 오신 다른 손님들만 애꿎게 놀라게 해버려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것도 여러 번 이었다.

 

아아, 역시 그냥 해본 말이었던 걸까.

 

 

Marguerite

02

 

*리효(@Fiancee_A)이세온(@Seon_nia_)이 함께 쓰는 릴레이 소설입니다.

*1화 링크 : http://fiancee01.tistory.com/56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갔다.

하긴, 애초에 꽃을 살 일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잖아.’ 라며 스스로를 다독여보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을 애써 머릿속 에서 지워내려고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이유 모를 애상감만 짙어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본 남자한테 느낄만한 감정이 아니잖아.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 푹 고개를 떨궜다.

꽃향기에 취한 것이 틀림없어. 아니, 이건 봄에 취한 거라고 해야 하나.

 

터덜터덜 늘어지는 발걸음으로 작은 수건 하나를 든 채,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포근한 온도로 내리 쬐는 태양,

청량함이 감도는 하늘, 화사하게 우러나는 꽃향기까지. 성큼 들어선 봄을 느끼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나른하게 부유하는 분홍빛 공기를 한가득 품고는 팔이 찌릿찌릿 저리도록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 뒤,

가게 앞에 진열된 작은 화분들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았다. 상큼하면서도 씁쓸한 향이 매력인 레몬 허브,

봄을 한가득 담은 듯 짙은 붉은 색의 맨드라미, 은은한 향기의 페라고늄, 부드러운 분 냄새를 머금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시클라멘까지.

마치 작은 화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하게 모여 있는 식물들이 햇살 아래에서 각기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고운 수건으로 이파리와 꽃잎에 붙은 먼지들을 살살 떼어내면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있자니 심란한 감정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절로 웃음이 베어 물어 졌다. 아아, 역시 꽃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자신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닥가닥 품고 있는 존재들. 같은 종류의 꽃은 수없이 많다지만, 어여쁘게 가꾸어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보살피고 사랑을 주어야지.

이 가녀린 꽃송이들이 어떤 이의 소중하고 유일한 기쁨이 되는 날까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못 해도 30분은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불편한 자세에 다리가 슬슬 뻐근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꾹 내리 누르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꽃들을 돌보고 있는데, 옆쪽 에서 들려오는 단정한 구두소리. 인적이 잦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냥 길을 지나가는 거라면 굳이 이쪽으로 붙어서 가지 않아도 되는데. 혹시 꽃을 사러 온 손님인건가 싶은 마음에

손에 쥔 작은 수건을 내려놓고,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 하려는데 그런 내 행동보다 조금 더 먼저, 어깨에 올라오는 손.

조심스러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손길에 자연스레 이끌리듯 뒤를 돌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꽤나 예쁜 모양새로 길게 뻗은 다리.

살짝 고개를 올리니 단정하게 묶인 은발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그 때 그 남자다.

 

저 기다렸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같이 놀란 듯 크게 뜨여지는 그의 눈.

사루비아 꽃잎을 섬세하게 새긴 듯한 그 눈동자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날,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그와 시선을 맞췄을 때도 느꼈지만 그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봄날의 달콤함과 열망이 뒤섞인 눈빛.

 

반응 보니까 진짜 기다렸나보네요.”

, 아뇨. 그게... 그냥 너무 놀라서...”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턱을 슬쩍 쓸어내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와서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아, 이게 무슨 추태지. 분명 바보 같아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온 몸이 무겁도록 느껴지는 민망함과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소까지 띄고 빙글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꾸역꾸역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 이 남자만 보면 자꾸 나사가 하나 빠진 것 마냥 맹하게 굴게 되는 것 같아.

 

... 사러 오신 거죠? 들어오세요.”

 

안정을 되찾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가게 안으로 그를 이끌고 들어갔다.

딸랑- 오매불망 기다렸던 손님이 온 것이 반가운 마냥 더 낭랑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그간 그를 기다리며 보였던 행동이

생각나 슬며시 부끄러워졌다그러자 금세 난로를 쬐고 있는 것 마냥 얼굴 가득 퍼지는 따끈따끈한 기운.

정신 차리자, 진짜. 봉숭아꽃물이 든 마냥 붉어졌음이 틀림없는 볼을 손등으로 툭툭 두들기고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떤 꽃으로 드릴까요?”

, 마거리트로 부탁드려요.”

 

, 마거리트다. 분명 처음 왔을 때 사간 꽃도 마거리트였는데.

이런저런 자잘한 생각들을 하며 길게 늘어진 화분들 사이에서 가장 예쁘게 피어난 아이를 들어 올리고 카운터로 돌아오는데

가게 안에 가득 들어차있는 꽃들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봄을 빼다 박은 이미지.

게다가 외모까지 봄꽃마냥 화사하고, 곱고, 거기에 성격까지 달콤하고 로맨틱한 타입 인 것 같았다. 선물로 마거리트라니.

내심 남자의 정성을 한 아름 품에 안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묘령의 여인이 부러워졌다.

그래, 저런 남자한테 짝이 없을 리가 없지.

 

화분에 살짝 묻어있는 흙을 닦아내고, 고운 개나리색의 리본과 포장지를 하나씩 꺼내드는데 나도 모르게 슬쩍 한숨이 내뱉어졌다.

아무래도 봄을 제대로 타는 모양이네. 그것도 그동안 타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몰아서.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남자에게 건네줄 화분에 포장지를 감싸고 리본을 둘러맸다.

바삐 손을 움직이면서 흘끗 남자를 쳐다보자, 어느새 내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시선에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눈을 내렸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건가 싶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따가울 정도로 내리꽂히고 있는 눈길.

덕분에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 이미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 하고, 그저 당황함에 우물쭈물

포장지만 바스락 거리다 분위기를 조금 풀기 위해 대화 주제를 하나 힘겹게 던졌다.

 

여자친구분이 마거리트를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친구요?”

 

의아하다는 듯 나직하게 이야기 하는 목소리.

 

... 보통 남자분이 꽃을 살 때는 여자친구 되시는 분에게 선물하려는 경우가 많아서...”

 

드문드문 이어지는 내 답변에 남자는 굉장히 미적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감해 보이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에 하던 말을 슬쩍 얼버무려 버리고 살살 눈치를 봤지만 남자의 입은 굳게 닫혀서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그냥 가만히 있을걸. 후회가 진득하게 몰아쳤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졌다. 입이 방정이란 것이 이런 경우겠지.

사과의 말을 건넬까 했지만 왠지 더 분위기를 깰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운터 위에 놓인 자그만

탁상시계에서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릴 정도로 계속 되는 정적, 1초가 1년 같은 순간.

불편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조금 더 속도를 내서 포장을 마무리 했다.

새로운 꼬까옷을 입고 어여쁘게 꾸며진 화분을 말없이 내밀자 카운터 앞으로 좀 더 가까이 걸어온 남자는 자켓의 안주머니를

잠시 뒤적이더니 곧 카드를 한 장 꺼내서 건넸다. 조심히 받아들고 결제를 진행하는데, 갑작스럽게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

 

, 여자친구 없습니다.”

?”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새된 목소리로 되물은 나에게,

남자는 조금 더 또박또박하게 입술을 열어 확실하게 읊어주었다.

여자친구, 없다고요.

 

... , ...”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대답도 제대로 못 한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혹시 오해를 받은 것이 기분 나빴던 건가.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 하나. 온갖 생각들이 정리 할 수 없을 만큼

번잡하게 뒤섞이는 와중에, 남자는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멀끔한 얼굴로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꽃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 안녕히 가세요.”

 

그에 급히 생각을 멈추고 버벅거리는 발음으로 인사를 하자, 작게 목례를 한 남자는

포장된 마거리트 화분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남자에게서 작게 들려오는 말소리.

 

내일,”

 

또 올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남자는 가게를 나섰다. 딸랑, 딸랑.

입구에 매달린 작은 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늘어진 테이프 마냥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귓가에 울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듣던, 특별할 것 없는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지금 것은 꽤나 달큰하게 여운이 남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운터에 몸을 쭉 펴고 엎드렸다.

 

정말, 봄이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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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