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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my summer love

 

written by. Seon

 

Jumin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는 7월의 햇빛을 가득 품은 채, 아지랑이를 꽃피어 올리는 부산의 아스팔트 바닥.

그동안 유래가 없던 지독한 폭염이 될 거라는 뉴스를 전하던 앵커의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평소 추위나 더위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던 주민의 몸 역시 오늘은 꽤 덥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여름용 정장을 챙겼어야했나. 사업거래 차 여러 번 들렸던 부산에서 이정도의 더위를 느낀 적은 없었기에

날씨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게다가 주민은 입었을 때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여름용 정장보다는

묵직하고 중후한 착용감의 기본스타일 정장을 선호하는지라 애초에 여름용 정장 자체를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강 비서에게 몇 가지 사두라고 지시해야겠군.

 

주민은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낸 뒤 오늘따라 유독 더 무겁게 느껴지는 매끄러운 진회색 정장의 단추를 하나 풀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샐러리맨들, 캐쥬얼한 옷차림에 왁자지껄 웃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

그 사이를 묵묵히 지나가며 주민은 준비해야 될 서류들을 생각했다. 당장 내일이 미팅이다.

이렇게 걷고 있는 시간까지 완벽하게 사용해야 성공적으로 거래를 이끌 수 있었기에 주민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러 상황별 시뮬레이션을 떠올리려 했지만, 머릿속은 마치 고장 나버린 비디오테이프처럼 지직 거리다가

이내 새까만 화면만을 내보낼 뿐이었다.

 

꽤나 피곤하군. 따가운 눈을 손으로 덮어 한 번 쓸어내리며 주민이 중얼거렸다.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미팅 생각에 여념이 없었기에 휴식을 취하지 못 했다. 평소 같으면 이정도의 준비는 아무렇지 않게 소화 했을 텐데.

더위가 심한 탓일까. 슬핏 미간을 좁힌 주민은 조금씩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한숨을 내쉬고는

한 시라도 빨리 호텔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상태로는 어떤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에서 눈으로 정신의 초점이 맞춰진 그 때, 주민의 시야에 하얀 원피스가 보였다.

허리 까지 내려오는 갈색 빛의 머리카락, 유난히 마른 몸. 게다가 발에 신겨져 있는 것은 검은색 몸통에

하얀색 선이 세 개 그려진 슬리퍼. 저것을 삼선슬리퍼라고 하던가. 유성이 이것만큼 편한 것이 없다면서

매해 여름만 되면 줄기차게 신고 다니는 그 슬리퍼와 똑같은 모양새였다.

꽤 이질적인 차림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지나갔다.

 

주민 역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특이한 차림새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레 시선이 갈 뿐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하늘하늘한 모양새가 참으로 가냘파 보여 가던 걸음도 멈추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니

위태롭게 한 발짝 한 발짝 걷고 있던 여인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갑자기 바닥으로 천천히 스러졌다.

 

웅성웅성.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쓰러진 그녀를 가리키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

주민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고 상태를 살펴봤다.

다행히 가까이서 본 그녀는 기절하여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날이 너무 덥기에 어지럼증이 온 것이겠지.

아직 정신이 몽롱한지 느릿한 속도로 깜빡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주민은 그녀를 부축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팅 준비는 조금 나중에 해야겠군.

 

인근에 있던 조용한 공원의 벤치에 그녀를 앉힌 주민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C&R 사업이사 한주민. 작게 명함에 적힌 것을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주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민 씨.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주민은 조금 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목적지가 어디지?”

 

가는 곳 까지 함께 있어주지. 또 쓰러진다면 위험하니까. 무심히 건네지는 말에 그녀는 주민을 가만히 응시했다.

리고는 살짝 눈을 피하며 작게 한 병원 이름을 읊었다.

 

 

-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이었다. 그녀는 그 곳에 입원한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고 말했다.

왜 여기까지 나온 거냐고 묻는 주민의 말에 그녀는 침묵을 지키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멀리 걷고 싶었어요. 병원과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그 곳에서 사람들 틈새에 섞여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온화하게 웃었다. 근데 역시 힘드네요, 몸이 약하다 보니까.

 

원래 선천적으로 체력이 안 좋은 건가?”

 

주민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그저 가야 할 시간이 오면

잠을 자듯 조용히 떠나게 된다는 것이 그녀가 덧붙인 설명이었다.

 

"요즘 들어 조금 더 심해지는지 체력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져요. "

 

그래도 엄청 아파하면서 죽는 건 아니라 다행인 것 같아요.

미소를 머금고 덧붙여지는 말에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주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상황을 '다행'이라고 내뱉다니. 자신의 곁에 서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이 작은 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체념하고 살아왔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불쾌했다.

기껏해야 스물이나 갓 넘은 듯 보이는 어린 아가씨가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으며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세상에 조금 더 나은 죽음이란 것은 없어."

 

웃고 있던 여인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자신에게서 빗겨나간 채로 먼 곳을 바라보던

옅은 밤갈색의 눈이 주민을 천천히, 그러나 곧게 응시했다. 어떠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담긴 눈빛.

주민은 그 눈이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아픈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야 하는 건가?"

"..."

"물론 내가 그대의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오늘을 즐겁게 즐겼으면 해."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던 주민은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답지 않은 충고였다.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에게도 필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런 상황은 그로서도 꽤나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난 여인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다니 나답지 않았군.

게다가 이 쪽 역시 낯선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불쾌할 수도 있을 테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주민은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군. 무례한 말일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했어."

 

사과하지. 낮게 내뱉어진 주민의 말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약하게 기쁨이 들어차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말해준 사람은 그 쪽이 처음이에요.“

 

꽤 좋은 기분이네요. 작은 목소리가 나른하게 공기를 울렸다.

아까까지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은 금세 포근한 모양으로 뭉근하게 변했다.

입가에 미소를 배어 물은 그녀는 잠시 따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다시 주민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주민 씨,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조금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부탁일 수 있지만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주민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주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만일 시간이 되신다면 저를 보러 와주 실 수 있을까요?”

 

매일은 아니어도 돼요. 그냥 가끔씩 이어도 충분히 기쁠 것 같아요.

생각지 못 한 부탁에 주민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병문안이라.

잠시 주민의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또래의 친구가 없어서 매번 병문안은 부모님만 오셨거든요."

 

주민 씨는 저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시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는 가장 비슷한 나이고,

오늘 처음 만났지만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꼭 또 뵙고 싶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주민에게 향했던 시선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닥으로 푹 떨구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바래온 적 없는 작은 여인이

처음으로 욕심을 부린 것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전혀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은 흔쾌히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도록 하지.

 

 
-

 

 

그 후로 주민은 매일 같이 그녀의 병실을 찾아갔다. , 음료수, 과일 등 그녀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손에 들고서.

처음에는 왜 그런 걸 들고 오냐고, 몸만 와줘도 고맙다며 겸양을 떨던 그녀도 주민의 행동이 지속되자

언제부턴가는 장난 식으로 더 비싼 거 없냐는 농담을 던지고 꺄르르 웃기도 했다.

점점 그 나이에 맞게 밝아지는 모습을 주민은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지켜봤다.

이전에 처음 봤을 적, 모든 걸 체념한 채 의미 없이 지내오던 때와는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주민이 그녀를 보러 간지 딱 열흘이 되던 때, 그 날은 처리할 일이 많아서 조금 어두워진 시간에 그녀의 병실을 들렸다.

침대에 기대 앉아 창문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민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주민 씨.

 

일이 많아서 전부 처리 하고 오느라 늦었군. 오늘 별다른 일은 없었나?”

 

주민은 자연스레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서 앉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별 일 없었다며 잔잔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어진 주민의 말을 끝으로 시작된 잠시 간의 침묵. 요 근래의 그녀는 주민이 조용해도 늘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를 꺼내며 말을 이어갔는데 오늘의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약간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침체된 느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째깍째깍.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계초침소리만 병실 안을 울리던 그 때 그녀가 평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주민 씨, 그거 알아요?”

 

정적을 깨고 작게 내뱉어지는 물음에 주민은 의문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말이에요. 실은 좀 더 살고 싶어요.”

 

아니, 살고 싶어 졌어요.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말에 주민은 표정을 굳혔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지만, 언뜻언뜻 눈물이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

 

다시 대학 다니면서 예쁜 옷도 사 입고, 친구들과 편하게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이야기도 나누는 평범한 삶.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한텐 그런 시간이 없었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아쉬워 졌다고 해야 하나?”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진지한 주민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그냥 요새 주민 씨랑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여름을 타서 그러나? 애써 밝게 덧붙여진 음성에 주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여름을 타나보군.

장난스러움을 앞에 내세워 자신의 슬픔을 숨기는 그녀를 위해 주민은 그저 모른 척, 묵묵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기에. 주민의 대답 이후 잠시 말을 멈춘 채 조용해진 그녀는

이내 무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 ! 저 말이에요. 저렇게 평범한 일상도 바라고 있지만,

조금 더 특별한 것도 하나 더 바라고 있어요. 뭔지 알아요, 주민 씨?”

 

특별한 것이라. 단순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제를 돌리려던 말치고는 꽤나 궁금증이 생기게 한다.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거지? 주민의 물음에 그녀가 아이같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비밀! 나중에 말해줄게요.”

 

바로 이야기 하면 재미없잖아요. 다시 원래의 그녀처럼 밝게 돌아온 모습에 주민도 조금 편해진 미소를 내비췄다.

나중에는 반드시 알려주도록.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니까.

주민의 말에 그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알려줄게요,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오늘은 이만 가요, 주민 씨.”

 

내일은 도넛 한 봉지 사다줘요. 안에 딸기잼 든 거로만 잔뜩 넣어서요.

자신을 집에 보내면서 당돌하게 원하는 것 까지 함께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주민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마시기 좋은 주스와 함께 사오도록 하지. 좋은 밤 보내길."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뒤돌아 병실 문을 열고 나가는 주민의 모습을 그녀는 하염없이 바라봤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뚜벅거리는 구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민 씨도 좋은 밤 보내요. 빈 병실 안에는 그녀가 내뱉은 소리만 길을 잃고 맴돌았다.

 

 

-

 

 

그 이후로 거의 비슷한 나날이 이어졌다. 주민은 그녀를 위한 선물을 사들고 오고,

그녀는 기뻐하며 선물을 받은 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나날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가 많이 차분해졌다는 것.

자신이 병실에 찾아오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는 점점 밝고 활기찬 모습만 보였던 그녀였기에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반가운 징조가 아니었지만 주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러 온 지, 거의 한달 쯤 되는 날. 저녁노을이 슬쩍 얼굴을 내밀 즈음에

주민은 익숙하게 그녀의 병실에 들어왔고 그런 그녀 역시 주민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주민 씨, 왔어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서로에게 꽤나 물들었다고 주민은 문득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에 잔잔히 미소를 짓고 준비한 선물을 내려놓은 뒤 그녀를 바라보는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불안정하다.

평소랑 비슷한 모습인데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어색함과 이질감.

 

몸이 안 좋은 건가?”

? 에이~ 아니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

 

걱정 어린 마음이 가득 묻어나는 주민의 물음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내가 아파보였어요?”

조금은.

 

그녀의 물음에 주민은 짧게 답했다.

 

아프지는 않은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감성적인 것 같긴 해요.”

 

원래 사람이 꼭 한 번쯤은 그런 날이 오잖아요. 감정이 모락모락 부풀어 오르는 시기라고 해야 할까요?

, 근데 주민 씨는 맨날 무뚝뚝하니까 안 오려나? 감정의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는 자신을 딱 짚어 말하며 그녀가 방싯 웃었다.

 

이제 나에 대해 꽤 잘 아는군.”

 

그에 자신 역시 슬쩍 웃으며 농담으로 되받아쳐주자 생각지 못 한 반응인지 그녀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 처음 저와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 씨, 많이 변했네요.”

덕분이지.”

 

가볍게 대답한 주민은 그녀의 병실 침대 아래에서 보조침대를 잡아 빼고는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늘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던 날과는 다른 행동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로 거기에 앉는 거예요?”

내일은 해야 할 일이 없으니 이곳 에서 자고 갈 거야.”

“...진짜요?”

 

진짜에요? 정말 여기서 자고 가는 거예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거듭 묻는 그녀에게 주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부담스러운 건가?”

아니에요! 그냥... 믿기지가 않아서랄까? 주민 씨는 매일 일이 많으시잖아요.”

 

그녀의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거래처와의 미팅이 끝나고도 주민은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다.

원래라면 진즉 서울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리하게 부산에 남은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주민은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선택한 것.

굳이 그녀가 미안함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주민은 그저 쌓인 일을 어제 모두 마무리했기에 내일 여유가 생겼다고 짧게 말했다.

 

일을 다 끝냈다니... 다행이에요, 주민 씨.”

 

저 역시 기쁜 듯 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주민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맙군.

짧은 대답에도 그저 싱글싱글 웃고 있던 그녀는 잠시간 말을 멈추고 주민을 바라보더니 이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예전에 제가 특별한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한 말, 기억해요?”

 

그녀의 말에 과거를 더듬던 주민은 이내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 주민의 대답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그거, 주민 씨와 계속 함께 하는 걸 바란다는 말이었어요.”

 

원래 더 나중에 이야기 하려 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 전하고 싶어져서 그냥 말해버렸네요.

주민 씨가 있어서 많은 위안을 얻었어요. 고마워요.

아마 주민 씨와 알게 된 것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주민은 그녀를 응시했다. 부끄러운 듯 뺨에 자그맣게 붉은 물이 든 모습이 귀엽고, 어여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났는지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주민은 생각과는 다르게 무심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고백인건가?"

 

그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이내 이불까지 폭 뒤집어쓰며 작게 소리쳤다.

 

", 주민 씨! 고백 아니에요!“

 

이건 정말 고마워서 한 말이고, 고백은 좀 더, 나중에 할 거에요.

이불에 묻힌 채 웅얼거리듯 조그맣게 흘러나온 소리를 들은 주민이 크게 웃었다.

지금껏 주민이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지 못 했던 그녀는 더더욱 이불에 몸을 파묻고 웅크릴 뿐이었다.

주민은 지금 이 순간이 더 없이 즐거웠다. 조용히 다가오는 행복감, 그리고 사랑스러움.

 

한참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달랜 주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와 함께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대화는 나른하고 평온했다. 직접적으로 연인이 되어 함께 하자는 이야기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은 저와 그녀가 이미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 역시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서로 행복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평소보다 일찍 졸린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가 눈을 비볐다.

그에 잠자리에 들라고 말한 주민은 밝게 켜져 있는 병실의 불을 끄고는 베개를 베고 자리에 누운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토닥토닥 소리. 얇은 솜이 폭신하게 느껴지는 이불 위로 주민의 손이 마치 아이를 재우는 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떨어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나직하게 웃은 그녀였다. 주민 씨도 얼른 자요.

고요히 퍼져 나오는 목소리에 주민은 자그맣게 답했다.

 

그대를 재우고 나면 나도 자도록 하지.”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못 이기겠다는 한 번 웃고는 조금 더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미리 잘 자요, 주민 씨.”

 

병실을 맴돌던 그녀의 인사가 주민에게 닿았다. 그에 주민이 따뜻하게 답했다.

그대도 좋은 밤 되길. 아침에 봐.

 

... 나직하게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의 인사가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느낀 그녀였다.

 

 

-

 

 

아직 어슴푸레한 빛이 감도는 이른 새벽, 주민은 작게 느껴지는 갈증에 눈이 뜨였다.

몸에 덮힌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작게 마련된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로 시선이 갔다.

 

심장이 쿵쿵 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주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고, 이마도 만져보고, 작은 입술까지 만져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였다.

 

 

-

 

 

주민의 호출에 달려온 의사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고는 상태를 확인 하더니 차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렸다.

함께 따라온 간호사는 작은 하얀색 천을 그녀의 얼굴에 덮어주었다.

 

“2016823일 아침 612, 운명하셨습니다.”

 

주민은 그 풍경에서 제 삼자였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에 주민은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만을 쳐다봤다.

 

그리고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는지

꽤 빨리 병실에 도착한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아마도 전화를 받고 울면서 왔으리라.

딸의 얼굴을 가린 천을 치운 부모님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을 치고 오열했다.

 

아가야, 눈 좀 떠봐라. 내 아가. 하나뿐인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가면 이 엄마, 아빠는 어찌 살라는 거냐.

 

조그만 병실을 꽉 채우는 소리에도 주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가만히, 천이 치워진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그대로였다.

 

 

 

 

-

 

 

 

딸을 잃은 슬픔을 한창 토해내고 겨우 진정이 되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주민은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그녀와 만나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묵묵히 주민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그녀의 부모님은 딸과 함께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

주민은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은 모르겠지.

자신이 그녀를 통해 얻은 행복과 위안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장례는 그녀가 있던 병원의 인근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슬픔에 지친 모습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부모와 그들의 지인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모여 있는 와중에 그녀의 또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문득 처음 만난 그날, 자신에게 병문안을 와줄 것을 부탁하며 또래 친구가 없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주민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로 어여쁘게 웃고 있는 얼굴.

작게 여문 입술을 열어 '주민 씨' 하고 부를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너는, 떠났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그동안의 기억에 주민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걸음마다 그녀의 향이 묻어 있었다.

그 향을 가슴 깊이 들이마신 주민은 마음 속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단정하게 두 번의 절을 올렸다.

 

그 곳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언제나 행복하기를.

 

이어지는 목례.

 

그리고... 그대가 보고 싶어. 꽤 많이.

 

목례는 조금 길었다. 묵묵히 그녀에게 보내는 인사를 마치고 느릿하게 고개를 든 주민은

사진을 잠시 응시하고는 뒤를 돌아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밖을 나오자 8월의 여름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매만지고 지나간다.

그 기분좋은 쓰다듬에 잠시 눈을 감은 주민은 아까 하지 못 한 마지막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사랑을 줘서 고마웠어. 나의 작은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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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