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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편지

 

written by. Seon

 

Jumin

 

 

활짝 열린 창문 밖에서 사근사근한 풀내음이 실린 바람이 날아들었다.

완연한 봄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 포근함을 흩뿌리는 초록빛 향기.

서재를 정리하던 주민은 손을 멈추고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떠난 뒤 처음 맞이하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계절은 무심하게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푸른 나뭇잎들을 잔뜩 단 채로 올곧게 서있는 나무를 응시하던 주민은 시선을 돌려 서재 한 편에 놓인 책상을 쳐다봤다.

깔끔하게 정리 된 고급스러운 원목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손을 많이 탄 듯 표지가 군데군데 헤져있는 책 한 권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향기가 뭉근하게 맴돌던 따스한 봄날, 한 떨기 꽃이 되어버린 그녀를 그리며 쓴 편지가 담겨있는 책.

주민은 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몇 개월 전의 겨울, 그녀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었다.

미루고 또 미루었지만,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주민은 책상 앞에 앉은 뒤, 책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았다.

 

 

낮에 일이 있어서 잠시 외출을 했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한 송이 보았어.

새하얗고 작은 꽃이었는데, 잠시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그대가 생각나서 입을 맞추고 싶더군.

그냥 지나쳐오긴 했지만 일을 하는 내내 머리에 아른거려서 결국 돌아오는 길에

비슷한 모양의 꽃을 한 송이 사서 꽃병에 꽂아두었지. 그대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오늘은 유독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어. 그대가 꽤나 좋아할법한 날씨였지.

차분하게 쏟아지는 따스함을 가만히 느끼고 있자니 언젠가 나에게 소풍을 가자고 조르던 모습이 생각나더군.

그 때도 꼭 이런 날씨였지. 당시에는 일이 바빠서 미루었지만...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와 소풍을 간다고 약속할게, 나의 아가씨.

 

 

책에 쓰여 있는 편지들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글자의 한 획마다 그리움과 애정이 꾹꾹 담겨있었다.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유독 밝은 밤이야. 나의 공주님.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모르겠군.

나는 요 근래 들어서 오늘이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낸 것 같아.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군.

새로 맡게 된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면 괜찮아 지겠지.

그대는 나와 다르게 부디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만 가득했길 빌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지 날이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아.

그대가 더위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그대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선선한 계절이 왔으면 좋겠어.

혹여나 더워서 입맛이 없더라도 식사는 꼭 챙겨먹길 바라.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셰프를 고용해 챙겨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쉽군.

언제나 건강해야해, 나의 아가씨.

 

오늘 그대에게 어울릴법한 옷을 보았어. 새하얀 꽃이 촘촘히 수놓아져있던 노란색 원피스였지.

내가 생각해 온 그대의 분위기와 굉장히 닮았더군. 언젠가 그대에게 선물해주도록 하지.

부디 기뻐해주길 바라.

 

 

서재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주민이 간간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 바스락 울릴 뿐이었다.

사이, 편지에는 여름이 도래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 다가왔어. 올해의 여름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덥다고 뉴스에서 이야기 하더군.

나 역시 더위를 느끼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아.

이런 날에 건강을 해칠 확률이 크니 늘 유의하도록 해,

 

햇살이 꽤나 따가워. 아무래도 자외선 지수가 높은 모양이야.

그대의 여린 피부가 걱정되니 반드시 약을 바르도록 해.

긴팔과 긴바지를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덥긴 하겠지만 그대가 아파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잠이 오지 않고 있어. 더위 때문일까,

아니면 그대의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돌기 때문일까. 그대는 아무 탈 없이 잘 자고 있는 건가?

실은 그대 역시 내 생각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어.

나의 상상이겠지만 기쁘더군. 일단 회사 일도 있으니 잠을 청하려 노력해봐야겠어.

좋은 밤 보내, 나의 공주님. 꿈에서 만나.

 

내일은 바다에 갈 예정이야.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약간의 휴식이 필요 할 것 같더군.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을 거닐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나는군.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겸사겸사 그대의 말이 맞는지도 시험해보도록 하지.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선선해. 아무래도 엊그제 비가 온 것이 기온을 많이 떨어트린 것 같더군.

덕분에 조금은 숨통이 트인 기분이야. 그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더위가 풀렸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예전에 그대가 추천해주었던 책을 한 권 샀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

지금의 내가 읽으면 좋을법한 내용의 책이더군. 하지만 그 책을 보고 있자니

그대가 무척이나 그리워져서 금방 내려놓았어.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 때 마저 보도록 하지.

 

 

그 책은 여태껏 읽지 못 했군. 주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조금 서늘해지는 계절이 돌아왔어. 그대는 따뜻한 곳에서 편히 지내고 있는 건가?

아직 추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조심해야해. , 식사는 잘 챙기고 있는지도 걱정되는군.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해줘, 나의 공주님.

 

밖을 나가보니 나무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더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대가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를 만들던 것이 생각났어.

물론 금방 부스러져서 안타까워하던 얼굴까지도. 무척이나 귀여웠지.

다시 한 번 그 모습이 보고 싶군.

 

근처에서 축제가 열린다는군. 밤에는 불꽃놀이도 한다던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대와 불꽃놀이를 보러 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대라면 분명히 좋아했을 텐데... 다음에는 꼭 함께 가도록 하지.

한국이 아닌 해외의 불꽃놀이도 괜찮을 것 같아.

 

오늘 고급스러운 와인을 한 병 선물 받았어.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라더군.

나조차도 잊고 있던 생일이라... 우스운 이야기지만 난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지 않아.

물론 내 생일도 포함해서. 그렇게 중요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대의 생일만은 늘 머리에 새겨져있어.

, 그러고 보니 곧 그대의 생일이 다가오겠군. 미리 축하의 말을 건네지, 나의 공주님.

 

날이 조금씩 쌀쌀해지고 있는 느낌이야.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 두꺼워졌고, 회사에서도 히터를 틀기 시작했지.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춥지 않아. 지금 정도의 날씨만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군.

 

 

가을의 끝자락을 담은 책은 점차 겨울로 손을 뻗으며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 주민은 조금 굳은 눈빛으로 종이를 넘겼다,

 

 

첫 눈이 내렸어. 옅은 진눈깨비 정도였지만 신기한 기분이 들더군.

일기예보에서도 오늘 내린 눈을 기점으로 완전한 겨울이 온다고 했지. 벌써 겨울이 된 건가...

시간은 매정할 정도로 빨리 흐르는 것 같군. 나는 아직 봄에 머물러 있는데 말이야.

 

오늘은 잔업이 있어서 퇴근이 늦어졌는데, 겨울의 밤공기가 생각보다 더 차더군.

자칫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겠다는 생각을 했어.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그대가 사준 목도리를 착용하고 다녀야겠군. 내 아가씨도 옷은 따뜻하게 챙겨 입길 바라.

 

어젯밤의 꿈에는 아주 오랜만에 그대가 나왔어. 내가 보고 싶은 마음에 들러준 것이라면 꽤 기쁠 것 같군.

하지만 다음부터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는 내가 그대를 보러갈 테니까.

그러니 그저 편안한 곳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어줘.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잠시 창밖 을 내다보았는데, 하늘에서 천천히 동이 트고 있어.

어둠이 밀려나고 밝은 빛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대도 지금 이 시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는 건가?

 

 

  「생일 축하해, 나의 공주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하늘도 그대가 이 땅에 내려온 날을 축하하는지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

그대의 생일에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저녁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 하겠군.

대신 언젠가 함께 할 생일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줄테니 기쁘게 받아주길 바라.

오늘은 유독 더 그대가 보고 싶군. 무쪼록, 그대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길 기도하지.

 

 

펄럭. 아직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마지막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식적으로 피해왔었지만, 새로운 봄이 찾아온 만큼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 하겠지.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메말라 속이 텅 빈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은 뒤에

주민은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보내는, 그의 마지막 마음.

 

 

「아마 이 글이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그대가 떠난 이후부터 작은 책에 편지를 써왔는데, 벌써 마지막 한 장 만을 남겨두고 있더군.」

마음만 먹었다면 일찍 채울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 했어.

조금 두려웠거든. 나답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야.

이것마저 채우고 나면, 그대가 정말 내 곁에 없다는 것이 실감날 것 같았지.」

 

 

글씨를 조금 더 진하게 눌러썼다.

저 멀리, 그녀가 머무는 곳까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닿을 수 있도록.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아.

하지만 벌써 그대가 떠난 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 

이제는 나도, 그대를 보내는게 맞는 것 같군.」

 

 

작은 조약돌이 던져진 잔잔한 물에 은은한 파동이 일어나는 것마냥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주민은 아무렇지 않은듯 마저 편지를 써내려갔다. 

 

 

「무수한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그대와 같이 보낸 나날들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로 남을거야.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더없을 축복을 내려준 신에게도,

그리고 나의 옆에서 늘 함께 해주던 그대에게도.

부디 그 곳에서는 어떠한 아픔도, 고통도 없이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

혹여 내 걱정을 하고 있다면,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고 싶어.

 

 

느릿한 속도로 조금씩 채워지던 작은 책은 어느새

 줄 정도의 여백을 제외하고는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만년필 끝에 진득하게 묻은 잉크를 한 번 닦아낸 주민은 담담하게 한 줄을 채워넣었다.

 

 

내가 이 말을 한 적이 있던 가 모르겠군.

 

 

마지막, 두 줄.

 

마치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듯 미동도 없이 얌전한 빈 공간을 잠시 바라보던 주민은

그 어느때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워나갔다.

속에 품어온 연정을 가득 담아서.

 

 

사랑해.

늘 사랑하고 있어.

 

 

... 만년필을 내려 놓고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남은 미련도 함께 덮어 눌렀다.

 

 

어쩐지 후련하면서도 허탈한 기분에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주민을

검푸르게 깔려오는 저녁의 어둑함이 위로하듯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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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점 보는 김춘팔 :